장미꽃을 사랑하는 사람들-황옥주 수필가
2022년 09월 23일(금) 01:00
장미는 영국의 국화다. 붉은 장미 문양인 랭커스터가의 헨리 7세가 흰 장미를 문양으로 한 요크가의 엘리자베스를 왕비로 맞이하면서 장장 30년에 걸친 ‘장미전쟁’이 끝을 맺었다. 이후 두 왕의 문양을 합쳐 왕실의 새 문양을 만들어 내면서 나라꽃이 된 것이다.

장미는 아름다움도 향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요염한 꽃이다. 신이 처음 장미꽃을 만들었을 때 향과 미에 취한 큐피드가 다짜고짜 꽃잎에 입술을 댔다. 꽃 속에서 향을 즐기고 있던 벌이 기겁하며 큐피드 입술에 날카로운 침을 박아 버렸다. 놀란 것은 아프로디테, 큐피드 입술의 벌침을 뽑아 줄기에 꽂아 놓은 바람에 장미나무에 가시가 돋게 됐다.

때문에 곱고 향기롭다고 마냥 탐해서는 안 되는 위험한 꽃이 장미다. 중국 속담에 “젊어서 장미 위에 누우면 늙어서는 가시밭에 눕게 된다”는 경구가 있다. 탐닉도 절제가 있어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시인 릴케는 장미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그 가시에 찔려 죽었다. 부인과 이혼하고 여행을 즐겼던 릴케에게는 여자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 마지막 연인이 이집트의 니메르 베이 부인으로 알려져 있다. 릴케는 먼 길을 달려온 애인을 위해 장미를 꺾어 모으다가 손가락이 가시에 찔렸다. 그러나 백혈병에 걸린 줄 모르고 치료만 하다가 파상풍으로 죽음에 이르고 말았다.

북유럽을 여행했을 때다. 산골짝 도로변에 세워진 작은 비석 앞에서 가이드가 잠시 버스를 세웠다.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의 가족이 세운 비석이라며 이름과 사망일이 적혀 있단다. 내겐 참으로 생경한 장면이었다. 평소 망자가 좋아한 꽃이라며 장미가 놓여 있었다. 국화가 흔한 철에 귀한 장미다.

다음 날 도착한 나라가 핀란드였다. 헬싱키의 중심 광장에 이르러 대통령궁이며 정부 청사며 총리 집무실보다 시선을 끈 것이 커다란 동상이었다.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라 했다. 기단에 놓인 꽤 큼직한 장미꽃 화환이 인상적이었다.

핀란드는 600년 동안 스웨덴의 지배를 받다가 1809년부터 독립할 때까지는 스웨덴을 물리친 러시아의 자치령이었다. 러시아 황제와 핀란드 왕을 겸한 사람이 알렉산드르 2세다. 제 나라 수도 광장에 침략국의 황제 동상이 있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알렉산드르는 핀란드 의회를 구성하고 핀란드어 사용을 장려하여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우리 문화를 지우려 악랄한 짓을 다 한 일제와는 근본이 달랐다. 크림반도가 러시아에 침공당할 때만 해도 중립국을 고수했던 나라가 이제 나토를 택했으니 알렉산드르 동상이 언제까지 헬싱키 광장에 남아 있을지는 두고 볼 일이다.

장미 사랑 얘기의 백미는 아마 ‘백만 송이 장미’가 아닐까 한다. 조지아의 화가 니코 피로스마니아와 여배우 마르가리타 사이의 짧고 슬픈 러브 스토리를 노래한 시다. 가난한 무명 화가 니코가 악단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미모의 여배우를 보고 첫눈에 반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많은 남자의 관심을 끌던 도도한 여자의 마음이 초라한 화가에게 쏠렸을 리는 없었을 것이다.

니코는 마르가리타가 장미를 좋아한다는 것과 생일을 알아냈다. 작은 집을 팔고 심지어 매혈까지 하면서 무려 백만 송이의 장미를 사들였다. 생일날 아침 창문을 연 그녀가 장미향에 감동했다. 그러나 니코에게 머문 웃음과 마음은 너무 짧았다. 장미를 치우는 일도 보통 일거리는 아니었을 터, 사랑은 구걸로 얻어지는 게 아니다. 막무가내 식 집념에 처절함까지 느껴진다.

러시아 시인이 쓴 ‘백만 송이 장미’는 러시아 작곡가가 곡을 만들고 러시아 가수에 의해 널리 퍼져 나갔다. 80년대 말 일본 국민가수 가토 도키코는 맑고 경쾌하고 빠른 템포의 이 노래로 선풍적 인기를 누렸었다. 한국에서는 90년대 말 청아한 미성의 심수봉이 대히트를 쳤던 노래다. 그 후 니코 피로스마니아는 극도의 빈곤을 벋어나지 못하고 어느 추운 날에 쉰여섯으로 생을 마쳤다. 니코의 그림은 사후에야 인정을 받아 그의 초상화는 화폐에까지 실렸지만 죽은 뒤의 영광이 무슨 소용이리.

결국 시들고 말 것임에도 장미는 사치스럽다. 신화나 전설, 문학작품이나 가곡도 많다. 작가 최인훈이 “장미꽃을 빼고서 서양문학을 말하는 것은 달을 빼고 이태백을 말하는 것과 같다”고 한 것도 이 때문일 게다. 문학은 사람들의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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