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마음 심(心)자가 제일이라 - 김향남 수필가
2022년 09월 19일(월) 01:00
어쩐지 좀 심란한 날, 옛이야기 한 편을 읽습니다. 제목은 ‘덴동어미 화전가’입니다. 옛날 우리 어머니들은 해마다 봄이면 야외로 나가 화전놀이를 즐겼다고 하지요. 메마른 대지에 생기가 돌고 잿빛 산자락에 진달래가 피어나면 모처럼 밖으로 나가 꽃놀이를 했습니다. 꽃잎을 따서 화전도 부쳐 먹고 북장구 가락에 춤도 추고 노래도 불렀지요. 묵은 때를 벗겨내듯 몸과 마음을 힐링하는 뜻깊은 날이었어요. 그로부터 시작된 것이 ‘화전가’라고 하는데요. 전해오는 작품들이 꽤 많지만 그중 백미는 ‘덴동어미 화전가’입니다. 만고풍상을 다 겪은 한 여성의 이야기가 오늘의 우리에게도 사뭇 깊은 울림을 주고 있거든요.

‘덴동어미 화전가’는 ‘덴동어미’의 이야기입니다. ‘덴동이’는 ‘불에 덴 아이’라는 뜻이에요. 늙어서 얻은 귀한 자식인데 불이 나서 그만 불구가 되고 만 거죠. ‘덴동어미’는 그래서 얻은 이름이구요. 그런데 문제는 그게 끝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보다 더한 불행이 줄줄이 더 있었다는 말인데요. 어떻게 인생이 그렇게도 꼬일 수 있을까요? 세상에, 세 번 개가(改嫁)하고 네 번이나 상부(喪夫)를 당한다는 게 말이 돼요?

믿기지 않는 이야기지만 사실 여부를 따질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현실은 상상을 초월할 때가 의외로 많으니까요. 요즘 나오는 뉴스들을 봐요. 감히 상상도 못 할 일들이 버젓이 뉴스거리가 되곤 하잖아요? 영화도 아니고 드라마도 아니고 진짜 뉴스에서 말이에요. 그러니 ‘덴동어미’의 그 사연이 꼭 지어낸 것은 아닐 거라고 봅니다. 더구나 ‘덴동어미’가 살았던 시대는 여자 혼자서는 살기 힘든 세상이었습니다. 삼종지도(三從之道)니 수절이니 권장하기만 했지 정작 남편이나 아들이 없는 여성의 처지에 대해서는 아무 대책이 없었으니까요. 그 때문에 사회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궁지에 몰린 여성들은 어쩔 수 없이 ‘개가’라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에게는 타고난 본능 같은 것이 있잖아요? ‘기어이 한 번 살아 보려’는, 그 의지 말이에요. ‘덴동어미’ 역시 그랬던 겁니다. 그럼에도 철저히 실패하고 참혹하게 몰락한 채 고향으로 돌아오지만요.

어렸을 땐 ‘덴동어미’도 부모 사랑 듬뿍 받으며 귀하게 자랐죠. 그러나 그런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누가 알았겠어요? 열여섯에 맞이한 첫 낭군은 그네에서 떨어져 죽고, 둘째 낭군은 전염병에 죽고, 셋째 낭군은 폭우로 죽고, 넷째 낭군은 화마로 죽었습니다. 세상의 불행이란 불행은 죄다 그녀 차지였어요. 죽음과 죽음, 삶과 삶, 삶과 죽음 사이, 그 사이사이의 일들은 또 말해 무엇할까요.

몸도 마음도 너덜너덜, ‘덴동이’ 하나 들쳐 업고 속절없이 고향으로 왔습니다. 오십 년 가까이를 밖으로 떠돌다가 어느덧 발길 닿은 곳이 고향이었던 거예요. 반겨주는 사람은 없어도 손 내밀 최후의 안식처는 고향밖에 없었던 걸까요? ‘덴동어미’는 마을 어귀 풀밭에 앉아 서럽게 웁니다. 후회와 부끄러움과 설움이 복받쳐 땅을 후비며 통곡합니다. 그때 한 노인이 다가와 묻습니다. 왜 그렇게 우시오. 무슨 일인데 그러시오. 울음을 그치고 사정이나 말해 보오.

그러구러 화전놀이 날입니다. 향긋한 꽃지짐 냄새와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온 천지에 가득합니다. 일 년에 한 번 해방의 날을 맞아 아낙들은 노래도 하고 춤도 추고 엉덩 글씨도 쓰면서 신나게 놉니다. 그중에 ‘덴동어미’ 누구보다 흥겹고 누구보다 잘 놉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제 처지를 생각하면 어떻게 노래가 나오고 춤이 나올 수 있을까요.

맞아요. ‘덴동어미’가 달라졌습니다. 아모르 파티(Amor Fati)! 운명은 나의 것, 있는 그대로 사랑하자. 한순간 마음의 변화가 일면서 모든 걸 뒤집어 버렸습니다. 불행이며 고통이 가져다준 최고의 선물이었어요. 그것들은 끊임없이 어떤 가능성을 끌어내게 했고, 극복하고자 했으며, 그래서 삶을 다시 살게 했어요. 암흑 같기만 하던 ‘덴동어미’의 마음이 활짝 열리기 시작했던 거죠. 폭우가 내리치고 거친 황토물이 휩쓸고 난 후면, 강물은 더 맑아져 여유롭게 흐르듯이 말입니다. 이윽고 ‘덴동어미’에게도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고운 꽃도 새겨 보면 눈이 캄캄 안 보이고 / …새소리도 고쳐 들으면 슬픈 마음 절로 나네 / 맘 심(心)자가 제일이라. 단단하게 맘 잡으면 꽃은 절로 피는 거요, 새는 예사 우는 거라…”

‘덴동어미’의 말씀은 열여섯 어린 과부의 마음에도, 거기 모인 또 다른 마음들에도 깊은 위로가 되었어요. 아, 지금 여기 훗날의 독자에게도 깊이깊이 와닿고 있습니다. 맘 심(心)자가 제일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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