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와 아내-강성률 광주교대 명예교수·철학박사
2022년 09월 15일(목) 00:15 가가
크고 둥근 얼굴에 벗어진 이마, 개구리처럼 툭 불거진 눈, 주저앉아 뭉툭해진 코, 두툼한 입술, 땅딸막한 키, 불거진 배, 그리고 오리걸음같이 뒤뚱거리는 걸음걸이, 여기에 몹시 거친 피부까지 거의 완벽에 가까우리만치 추남인 사나이, 과연 그가 누구일까? 바로 세계 4대 성인 가운데 한 사람인 소크라테스이다.
외모 지상주의가 팽배한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의 외모는 그의 어린 시절부터 장안의 화제였다. 못생기기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혔던 바, 철학자로서보다 먼저 ‘추남’으로 널리 알려졌던 셈이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이 아무리 놀려도 그는 밝고 건강하기만 하였다. 심지어 자신의 용모에 대한 주변사람들의 놀림을 우스갯소리로 즐기기까지 하였다. 자기 눈은 사방을 잘 볼 수 있도록 툭 튀어 나왔으며, 길고 똑바른 코보다 뭉툭한 코가 냄새를 더 잘 맡는다고 자랑하여 주변을 웃겼던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석수쟁이(돌 조각가)인 아버지와 산파(産婆: 오늘날의 산부인과 의사나 조산원)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직업을 물려받거나 가족을 돌볼 생각은 도무지 하지 않은 채, 제자들 가르치는 일에만 열중하였다. 비록 누추한 옷차림이었으나 그의 뒤에는 많은 제자들이 따르고 있었으며, 그 가운데는 상류층 출신도 많이 끼여 있었다. 그럼에도 소크라테스는 보수 없이 이들을 가르쳤고, 기껏해야 저녁 한 끼로 만족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아내 크산티페는 남편이 철학자라는 직업을 갖지 못하게 하려고(당시 철학자가 되는 것은 ‘가난’해짐을 의미했기에) 온갖 방법을 다 썼다. 집에서 지옥을 방불케 할 정도로 남편을 못살게 굴었다. 어떤 사람이 “당신은 아내의 잔소리를 어떻게 견디어냅니까?”라 묻자, 소크라테스는 “물레방아 돌아가는 소리도 귀에 익으면 괴로울 것이 없지요!”라고 대답했다. 하루는 집에서 제자들과 강론을 하고 있는데, 아내가 잔소리를 했다. 이를 들은 척 만 척 하자 아내는 큰소리로 욕을 하며 물을 퍼부었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제자들에게 “천둥이 친 다음에는 소나기가 오는 법이라네”라며 껄껄 웃었다. 그녀는 남편을 뒤쫓아 가 시장 한복판에서 옷을 마구 잡아당겨 찢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소크라테스는 전혀 개의치 않았으며, 끈질긴 인내심으로 잘 버텨냈다. 그런데 아내가 들볶아댐으로써 오히려 얻어지는 것이 있었으니, 소크라테스는 불화가 끊이지 않는 집을 서둘러 나와 아테네 시민과 제자들과 더불어 철학적 담화로 빠져들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니체는 “소크라테스를 소크라테스로 만든 것은 바로 크산티페이다”라 말했다.
어느날 소크라테스 집안 형편을 잘 아는 제자가 물었다. “선생님! 결혼하는 것이 좋습니까?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까?” 이에 대한 대답은 제자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결혼하게. 온순한 아내를 얻으면 행복할 것이고, 사나운 아내를 얻으면 철학자가 될 테니!”였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아내는 ‘사나운’ 크산티페 한 명으로 그치지 않았다는 설이 있다. 미토르라는 여자가 한 명 더 있었다는 것. 소크라테스가 50세 때 25세의 크산티페와 결혼하였으니, 두 번째 아내인 미토르는 그보다 훨씬 더 어렸을 것이다. 결국 ‘젊은 아내’ 크산티페와 ‘어린 아내’ 미토르 둘은 힘을 합하여 남편을 향한 바가지를 무섭게 긁어댔다는 이야기가 된다. 여기에서 보듯, 아테네에서 중혼(重婚)이 법적으로 허락된 데에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인한 소모전과 끔찍한 대역병(大疫病)으로 인해 아테네 성인 남자의 3분의 1이 사망한 상황과 관련이 있다.
그렇다면 과연 ‘추남과 악처들의 대결’은 어떻게 마무리되었을까? 사형을 앞둔 소크라테스의 감옥에 아들 셋이 찾아오는데, 장남은 크산티페의 아들로서 이미 청년이었고, 차남과 삼남은 미토르의 자식들로서 아직 어린 상태였다. 이들과 동행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두 여인은 감옥이 떠나갈 듯 울어댔고, 소크라테스는 이들을 즉시 내보냈다. 그리고 독배를 마시는 순간 울음을 터뜨리는 제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내가 여인네들을 돌려보낸 것은 바로 이런 꼴을 보기 싫어서였네. 사람은 마땅히 조용히 죽어야 한단 말일세.”
그럼에도 소크라테스는 전혀 개의치 않았으며, 끈질긴 인내심으로 잘 버텨냈다. 그런데 아내가 들볶아댐으로써 오히려 얻어지는 것이 있었으니, 소크라테스는 불화가 끊이지 않는 집을 서둘러 나와 아테네 시민과 제자들과 더불어 철학적 담화로 빠져들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니체는 “소크라테스를 소크라테스로 만든 것은 바로 크산티페이다”라 말했다.
어느날 소크라테스 집안 형편을 잘 아는 제자가 물었다. “선생님! 결혼하는 것이 좋습니까?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까?” 이에 대한 대답은 제자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결혼하게. 온순한 아내를 얻으면 행복할 것이고, 사나운 아내를 얻으면 철학자가 될 테니!”였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아내는 ‘사나운’ 크산티페 한 명으로 그치지 않았다는 설이 있다. 미토르라는 여자가 한 명 더 있었다는 것. 소크라테스가 50세 때 25세의 크산티페와 결혼하였으니, 두 번째 아내인 미토르는 그보다 훨씬 더 어렸을 것이다. 결국 ‘젊은 아내’ 크산티페와 ‘어린 아내’ 미토르 둘은 힘을 합하여 남편을 향한 바가지를 무섭게 긁어댔다는 이야기가 된다. 여기에서 보듯, 아테네에서 중혼(重婚)이 법적으로 허락된 데에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인한 소모전과 끔찍한 대역병(大疫病)으로 인해 아테네 성인 남자의 3분의 1이 사망한 상황과 관련이 있다.
그렇다면 과연 ‘추남과 악처들의 대결’은 어떻게 마무리되었을까? 사형을 앞둔 소크라테스의 감옥에 아들 셋이 찾아오는데, 장남은 크산티페의 아들로서 이미 청년이었고, 차남과 삼남은 미토르의 자식들로서 아직 어린 상태였다. 이들과 동행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두 여인은 감옥이 떠나갈 듯 울어댔고, 소크라테스는 이들을 즉시 내보냈다. 그리고 독배를 마시는 순간 울음을 터뜨리는 제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내가 여인네들을 돌려보낸 것은 바로 이런 꼴을 보기 싫어서였네. 사람은 마땅히 조용히 죽어야 한단 말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