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박진영 공감커뮤니케이션 대표
2022년 09월 14일(수) 01:00 가가
독일 나치 정권의 선전장관으로 여론 조작을 맡았던 괴벨스는 “메시지를 단순하게 해서, 쉼 없이 반복하라. 그러면 삼각형을 원이라고 믿게 만들 수도 있다”라고 했다. 하필 괴벨스의 말이라 인용하려니 마음이 불편하지만, 반복이 메시지를 강하게 하는 매우 확실한 방법임은 부정하기 어렵다. 같은 단어를 여러 차례 반복 사용하면 메시지의 강도가 높아지고 듣는 사람에게 감동과 공감을 갖게 할 수 있다.
기업들도 메시지 반복의 효과를 잘 알고 있는 듯하다. 같은 메시지를 담은 광고를 계속 내보내는 일이 많다. 커피 브랜드 맥스웰하우스가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맛있어요”라는 광고 카피를 1915년부터 지금까지 쓰고 있는 것이나, 아이보리비누가 1891년부터 ‘물에 뜨는 비누’라는 메시지를 계속 쓰고 있는 것이 그 예다.
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 의장도 8월 26일 잭슨홀 미팅에서 연설하면서 ‘인플레이션’이란 단어를 45번이나 언급했다. 8분 50초의 길지 않은 연설 가운데 이렇게 인플레이션을 강조한 것은 연방준비제도가 경기 침체를 감수하더라도 기준 금리를 큰 폭으로 더 올려 물가 상승을 억제하겠다는 뜻을 분명하게 밝힌 것이다.
정치인들도 반복법을 잘 활용한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2005년 11월 30일 해군사관학교 연설에서 승리(victory)라는 단어를 여러 차례 사용한 일은 유명하다. 부시 대통령은 당시 벌어지고 있던 이라크전의 전황이 호전되고 있다며, 승리의 계획을 사람들에게 역설했다. ‘승리’를 15번이나 강조한 이 연설 이후 여론조사에서 30%대에 머물고 있던 지지율이 5~6퍼센트 포인트 상승했다. 버락 오마바 대통령도 취임 연설에서 ‘우리’(we)라는 단어를 60번이나 언급한 바 있다.
윤석열 대통령도 같은 단어를 반복하는 메시지 전달법을 쓰고 있다. ‘자유’라는 단어를 특히 많이 쓰고 있다. 출마선언문에서 14번, 취임사에서 30번, 8월 15일 광복절 경축사에서 30번을 썼다. 자유민주주의라는 단어를 쓸 때 사용한 것을 빼고 센 것이다.
그런데 ‘자유’ 메시지는 그다지 화제가 되지 않는 것 같다. 자유가 어떤 시대정신을 담은 것인지 불분명하게 다가온다는 평이 적지 않다. 왜 그럴까? 자유는 매우 추상적인 단어다. 똑같은 단어라도 누가 말하느냐와 어떤 상황에서 말하느냐에 따라 의미는 매우 달라진다.
김남주 시인은 1986년 ‘자유’라는 시에서 이렇게 읊었다. “만인을 위해 내가 노력할 때/ 나는 자유이다/ 땀 흘려 힘껏 일하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싸울 때 나는 자유이다/ 피 흘려 함께 싸우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그 자유와 지금 윤 대통령이 말하는 자유는 분명 다르다고 여겨지는데, 어떻게 다르고 왜 중요한지를 듣는 사람이 이해하고 공감하기 쉽지 않다. 윤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인 지난해 12월 22일 전북대에서 열린 대학생들과 미팅에서 “자유의 본질은 일정 수준의 교육과 기본적인 경제 역량이 있어야만 알게 되는 것”이라며 “극빈의 생활을 하고 배운 게 없는 사람은 자유가 뭔지도 모를뿐더러 왜 개인에게 자유가 필요한지 필요성 자체를 느끼지 못한다”고 말한 바 있다. ‘자유’라는 단어가 많은 이들에게 의도하는 공감을 선사했는지 한 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자칫 ‘자유’의 반복 사용이 오히려 해가 될 수도 있겠다. 조지 부시 대통령이 평소에 반복법을 자주 사용한데 대해 영국 BBC 라디오 시사프로그램 진행자인 존 험프리는 ‘할 말을 잃다’(Lost for Words)라는 저서에서 “자유, 진실, 민주주의 등의 단어가 가지는 어감을 완전히 무시한 채 총알을 쏟아내듯 이런 단어를 남발하고 있으며, 지겨울 정도로 반복하면서 고귀한 단어를 ‘죽은 단어’로 만들고 말았다”고 비판한 적이 있다.
강조하고 싶은 메시지가 상대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면 공감을 얻기 어렵다. ‘자유’ 또한 국민에게 가치 있고 공감 가는 메시지로 전달되기를 바란다.
윤석열 대통령도 같은 단어를 반복하는 메시지 전달법을 쓰고 있다. ‘자유’라는 단어를 특히 많이 쓰고 있다. 출마선언문에서 14번, 취임사에서 30번, 8월 15일 광복절 경축사에서 30번을 썼다. 자유민주주의라는 단어를 쓸 때 사용한 것을 빼고 센 것이다.
그런데 ‘자유’ 메시지는 그다지 화제가 되지 않는 것 같다. 자유가 어떤 시대정신을 담은 것인지 불분명하게 다가온다는 평이 적지 않다. 왜 그럴까? 자유는 매우 추상적인 단어다. 똑같은 단어라도 누가 말하느냐와 어떤 상황에서 말하느냐에 따라 의미는 매우 달라진다.
김남주 시인은 1986년 ‘자유’라는 시에서 이렇게 읊었다. “만인을 위해 내가 노력할 때/ 나는 자유이다/ 땀 흘려 힘껏 일하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싸울 때 나는 자유이다/ 피 흘려 함께 싸우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그 자유와 지금 윤 대통령이 말하는 자유는 분명 다르다고 여겨지는데, 어떻게 다르고 왜 중요한지를 듣는 사람이 이해하고 공감하기 쉽지 않다. 윤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인 지난해 12월 22일 전북대에서 열린 대학생들과 미팅에서 “자유의 본질은 일정 수준의 교육과 기본적인 경제 역량이 있어야만 알게 되는 것”이라며 “극빈의 생활을 하고 배운 게 없는 사람은 자유가 뭔지도 모를뿐더러 왜 개인에게 자유가 필요한지 필요성 자체를 느끼지 못한다”고 말한 바 있다. ‘자유’라는 단어가 많은 이들에게 의도하는 공감을 선사했는지 한 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자칫 ‘자유’의 반복 사용이 오히려 해가 될 수도 있겠다. 조지 부시 대통령이 평소에 반복법을 자주 사용한데 대해 영국 BBC 라디오 시사프로그램 진행자인 존 험프리는 ‘할 말을 잃다’(Lost for Words)라는 저서에서 “자유, 진실, 민주주의 등의 단어가 가지는 어감을 완전히 무시한 채 총알을 쏟아내듯 이런 단어를 남발하고 있으며, 지겨울 정도로 반복하면서 고귀한 단어를 ‘죽은 단어’로 만들고 말았다”고 비판한 적이 있다.
강조하고 싶은 메시지가 상대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면 공감을 얻기 어렵다. ‘자유’ 또한 국민에게 가치 있고 공감 가는 메시지로 전달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