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생명이고, 그 생명은 영원하다-조선의 시인
2022년 09월 06일(화) 00:45 가가
아무리 좋은 것도 직업이 되면 그것에 대한 가치의 변화가 생긴다. 정신적 가치에서 물질적 가치로 바뀌는 것이다. 정신적 가치는 영감의 영역이지만 물질적 가치는 현실의 영역이다. 두 가치가 별개인 것 같아 보이지만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는 마주할 수 없어도 하나의 몸통이다. 그렇다면 가치의 변화가 만들어 낸 파생적 문제는 무엇일까. 주체가 내부에서 외부로 바뀌면서 불가피하게 이 낯설음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부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시를 쓰는 일이 내게는 어느 시점부터 단순한 정신적 가치에서 현실적인 물질적 가치를 동반하고 있다. 이는 나의 시가 갖는 사회적 범위로의 확장이기도 하다. 봄부터 여름까지는 아무런 결과도 없는 투자였지만 가을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열매를 보고 무엇을 심었는지, 맛을 보고 특상품인지, 결실의 양을 보고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가늠할 수 있었다.
시의 즐거운 활동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까닭은 참으로 사소한 데 있다. 시가 모든 것을 보여 주지 않기 때문이다. 보인다 싶으면 사라지고, 잡힌다 싶으면 도망가 버린다. 그렇게 다시 만나는 시의 모습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더 큰 매력으로 다가온다. 그 새로움에 몰두하는 일이야말로 즐거운 노동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요즘은 시 쓰기에 도전하는 연령층이 높아지고 있다. ‘말만 할 줄 알면 시를 쓸 수 있다’라는 선언적 구호 아래 나는 시 쓰기 교실의 높은 담을 허물고자 했다. 객관적 논증에 근거한 글쓰기와는 달리 시 쓰기는 시의 언어가 만드는 세상이다, 시어는 지식에서 비롯되지 않고 영감에서 비롯되기에 학력 불문, 나이 불문하고 말만 할 줄 알면 시를 쓰는 일이 가능해진다.
시를 쓰기 위해 필요한 도구는 내 마음의 지필묵이다. 그리고 내가 나를 만나는 일이다. ‘거짓 자아’가 ‘진짜 자아’를 만나야 한다. ‘진짜 자아’가 시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진짜 자아’를 만나기 위해 ‘가짜 자아’의 가면을 벗을 용기만 있다면 그때 시는 겹겹이 감추었던 자신의 알몸을 드러낸다. 시가 잉태한 생명은 눈물이다. 눈물은 일깨움이다. 그동안 볼 수 없었던 것들이 보여지고, 들을 수 없었던 것들이 들려지고, 알 수 없었던 것들이 알아진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인 만큼 안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을 부정문으로 해석해 보았을 때 ‘알지 못하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는다면 알아도 안 것이 아니다’가 된다. 이런 인지 능력의 한계를 단번에 극복해 내는 방법은 지식이 아니라 영감에 의해서다. 시가 내면 깊은 곳에 이르는 지점과 기도가 영혼의 호흡을 따라 도달하는 지점은 다르지 않다. 그래서 시는 한 편의 기도가 되기도 한다.
시대가 달라짐에 따라 시의 형식도 바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가 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신선도에 있다. 같은 재료를 가지고 어떻게 처음 맛보는 날 것으로 만들었냐에 따라 시는 생명력을 획득한다.
굳이 형식을 갖춘 시 쓰기가 아니더라도 문득 떠오르는 어떤 글귀가 있다면 틈틈이 메모해 두는 것도 좋다. 불현듯 떠오르는 것은 영감에 의한 것이기에 지나가면 잊혀지고 메모해 두면 그것만큼 신선한 것도 없다. 매일 맞이하는 일상 속에서 내일을 기대함은 그 알 수 없는 새로움에 있다.
‘내가 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시가 나를 만드는 것이다’라고 일찍이 괴테는 말했다. 시원해진 바람과 높은 하늘, 산책도 하고 운동도 하면서 사색하기 좋은 가을에는 하고 싶은 말도 영근다. 이 가을 시를 통하여 넉넉해지는 마음의 풍요를 자연과 더불어 사람과 더불어 나누고 싶다.
시를 쓰기 위해 필요한 도구는 내 마음의 지필묵이다. 그리고 내가 나를 만나는 일이다. ‘거짓 자아’가 ‘진짜 자아’를 만나야 한다. ‘진짜 자아’가 시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진짜 자아’를 만나기 위해 ‘가짜 자아’의 가면을 벗을 용기만 있다면 그때 시는 겹겹이 감추었던 자신의 알몸을 드러낸다. 시가 잉태한 생명은 눈물이다. 눈물은 일깨움이다. 그동안 볼 수 없었던 것들이 보여지고, 들을 수 없었던 것들이 들려지고, 알 수 없었던 것들이 알아진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인 만큼 안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을 부정문으로 해석해 보았을 때 ‘알지 못하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는다면 알아도 안 것이 아니다’가 된다. 이런 인지 능력의 한계를 단번에 극복해 내는 방법은 지식이 아니라 영감에 의해서다. 시가 내면 깊은 곳에 이르는 지점과 기도가 영혼의 호흡을 따라 도달하는 지점은 다르지 않다. 그래서 시는 한 편의 기도가 되기도 한다.
시대가 달라짐에 따라 시의 형식도 바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가 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신선도에 있다. 같은 재료를 가지고 어떻게 처음 맛보는 날 것으로 만들었냐에 따라 시는 생명력을 획득한다.
굳이 형식을 갖춘 시 쓰기가 아니더라도 문득 떠오르는 어떤 글귀가 있다면 틈틈이 메모해 두는 것도 좋다. 불현듯 떠오르는 것은 영감에 의한 것이기에 지나가면 잊혀지고 메모해 두면 그것만큼 신선한 것도 없다. 매일 맞이하는 일상 속에서 내일을 기대함은 그 알 수 없는 새로움에 있다.
‘내가 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시가 나를 만드는 것이다’라고 일찍이 괴테는 말했다. 시원해진 바람과 높은 하늘, 산책도 하고 운동도 하면서 사색하기 좋은 가을에는 하고 싶은 말도 영근다. 이 가을 시를 통하여 넉넉해지는 마음의 풍요를 자연과 더불어 사람과 더불어 나누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