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제'의 가치-명혜영 광주시민인문학 대표
2022년 08월 31일(수) 00:30 가가
“성적을 잘 받아 좋은 대학에 가고 싶었습니다.” 한밤중 교무실에 침입해 기말고사 문제와 답안지를 빼낸 혐의(업무 방해·건조물 침입)로 입건된 광주 모 고교 2학년 A군 등 두 명이 밝힌 범행 동기다. 교사의 컴퓨터를 해킹해 미리 답을 알고 시험을 쳤다가 동급생들의 고발로 덜미가 잡힌 사건이다. 더 놀라운 것은, 동급생의 인터뷰를 빌리자면 그들 중 한 명은 전교회장이고 나머지 한 명도 최상위권의 학생으로 모두 우등생이라는 점이다. ‘아! 이 끝 모를 욕망이여’. 더욱이 그들은 이번이 처음이 아닌 상습범이란다.
그러고 보면 작년에 Y대 로스쿨에서도 같은 사건이 있었다. 언급하기도 뭐하지만 학교 내에서의 커닝은 비일비재해 뉴스거리도 안 된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에서 이런 일이 왜 끊이질 않는 걸까?
필자는 그 원인으로 ‘다위니즘-자본주의’가 결탁한 무한 경쟁과 무한 욕망을 꼽는다. 그들이야말로 기성세대들이 물려 준 ‘다위니즘-자본주의’의 무한 경쟁과 무한 욕망의 화신들이라 본다. 한국 교육의 무한 경쟁 부추기기, 성적으로 줄 세우기, 대학은 ‘인(in) 서울’, 성공주의, 출세 지향 주의는 권력과 부의 축적을 쟁취한 사람들을 엄지척하고, 거기에다가 선민의식이라는 계급장까지 달아 준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엘리트주의라는 오만의 탈을 쓰고, ‘국민은 개 돼지’라는 표현도 서슴지 않는 폭군이 되었다. 급기야 이 사회는 무한 경쟁과 무한 욕망을 인정하고 양산하는 문화를 후대에 물려주고 만 것이다.
‘무한’이라는 어휘를 보면 알겠지만, 이는 이미 균형을 잃어 한쪽으로 기울어진 세계관이다. 교육 시스템에서는 지양해야 할 이런 관점을 오히려 철저히 관철시키고 각자도생할 것을 요구한다. 균형이 잡히지 않은 채로의 가치를 그야말로 폭력적 수준으로 강요하는 양태다.
경쟁의 방식을 다양화하고 욕망을 ‘절제’하는 인문학적 교육 효과는 보이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그곳에서의 인문학(국어·역사·윤리 등)은 그저 한낱 성적을 위한 도구로 전락해 있을 것이다.
괴테는 “진정한 행복은 절제에서 나온다”고 역설했다. 무한 욕망의 화신이 되어서는 행복이라는 인생의 목표에 도달하기 힘들다. 물론 최선의 삶을 살아 낼 수도 없다.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는 기꺼이 뒤쳐지고 더 많이 내려놓을 용기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절제’의 미덕은 어떻게 실천 가능한가? 절제는 개인의 특성 중 하나인 ‘자기 통제’에 속한다. 푸코는 자기 통제를 “스스로 통제하고 규율이 내면화된 개인” 즉 도덕적 규율을 내면화시킨 ‘스스로 자신의 내면을 감시하도록 하는 인간’이라 정의한다. 바야흐로 현대는 내가 나에게 규칙과 규범을 부여하고, 그것을 스스로 따르려고 노력하는 개인적 자율의 시대이다.
부분품으로서의 개개인이 자신 안에 공평한 관찰자를 만든다는 형태로 윤리적 내면 세계를 만든다면 조화로운 인간관계는 가능하다. 그렇다면 스스로에게 브레이크를 거는 ‘절제’의 기술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먼저 욕망을 이루면 또 다른 새로움을 욕망하는 ‘쾌락의 쳇바퀴’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한 번의 1등에 만족하지 않고, 아예 1등을 독차지하고 싶은 새로운 욕망. 이러한 욕망에 박수치는 교육 그리고 사회.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기성 질서에 굴하지 않고 자신을 통제하는 ‘나’를 형성해야 한다.
만일 행복해지고 싶다면 절제의 미덕을 발휘하여 ‘더 적게, 대신 더 철저히’라는 모토로 성찰하는 삶을 실천해 보자. 이는 인문학을 통해 가능하다. 문학을 통해 사람들의 다양한 삶을 경험하고, 역사를 탐구해 인간의 흐름을 이해한다. 또한 철학을 공부하며 삶의 의미와 가치를 논의해 보고 자기 성찰의 방법도 터득한다.
이로써 끊임없이 욕망에 대한 갈증을 유발하여 자원을 고갈하는 사회가 아니라 정신적으로 충만하고 풍요로운 삶, 지속해서 번영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절제를 통한 자기 통제가 수반되는 사회를 적극적으로 상상해야 할 때이다.
경쟁의 방식을 다양화하고 욕망을 ‘절제’하는 인문학적 교육 효과는 보이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그곳에서의 인문학(국어·역사·윤리 등)은 그저 한낱 성적을 위한 도구로 전락해 있을 것이다.
괴테는 “진정한 행복은 절제에서 나온다”고 역설했다. 무한 욕망의 화신이 되어서는 행복이라는 인생의 목표에 도달하기 힘들다. 물론 최선의 삶을 살아 낼 수도 없다.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는 기꺼이 뒤쳐지고 더 많이 내려놓을 용기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절제’의 미덕은 어떻게 실천 가능한가? 절제는 개인의 특성 중 하나인 ‘자기 통제’에 속한다. 푸코는 자기 통제를 “스스로 통제하고 규율이 내면화된 개인” 즉 도덕적 규율을 내면화시킨 ‘스스로 자신의 내면을 감시하도록 하는 인간’이라 정의한다. 바야흐로 현대는 내가 나에게 규칙과 규범을 부여하고, 그것을 스스로 따르려고 노력하는 개인적 자율의 시대이다.
부분품으로서의 개개인이 자신 안에 공평한 관찰자를 만든다는 형태로 윤리적 내면 세계를 만든다면 조화로운 인간관계는 가능하다. 그렇다면 스스로에게 브레이크를 거는 ‘절제’의 기술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먼저 욕망을 이루면 또 다른 새로움을 욕망하는 ‘쾌락의 쳇바퀴’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한 번의 1등에 만족하지 않고, 아예 1등을 독차지하고 싶은 새로운 욕망. 이러한 욕망에 박수치는 교육 그리고 사회.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기성 질서에 굴하지 않고 자신을 통제하는 ‘나’를 형성해야 한다.
만일 행복해지고 싶다면 절제의 미덕을 발휘하여 ‘더 적게, 대신 더 철저히’라는 모토로 성찰하는 삶을 실천해 보자. 이는 인문학을 통해 가능하다. 문학을 통해 사람들의 다양한 삶을 경험하고, 역사를 탐구해 인간의 흐름을 이해한다. 또한 철학을 공부하며 삶의 의미와 가치를 논의해 보고 자기 성찰의 방법도 터득한다.
이로써 끊임없이 욕망에 대한 갈증을 유발하여 자원을 고갈하는 사회가 아니라 정신적으로 충만하고 풍요로운 삶, 지속해서 번영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절제를 통한 자기 통제가 수반되는 사회를 적극적으로 상상해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