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사랑, 행복한 삶-양관수 소설가
2022년 08월 25일(목) 00:30 가가
“여자, 이 살아 있는 신화의 보따리를 풀고자 한다면 그들을 더욱 사랑하는 길밖에 없다. 이 땅의 천국과 지옥은 그들의 손안에 있기 때문이다.”(김산해 ‘최초의 신화 길가메시 서사시’)
이 글은 기원전 8000년 수메르의 점토판에서 발견한 길가메시 신화 중 일부다. 신석기가 발현되는 시점이다. 이전에는 대부분 모계 사회였다. 상속이 딸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후 남성들이 부를 축적하며 상속을 아들에게 하려 했다. 권력가 남성들이 아들을 확보하려 모계 사회에 길든 여성들을 억압했다. 다부다처제를 일부다처제로 바꾸려 한 것이다. 친아들이 많을수록 좋은 게 가치로 자리 잡아갔다. 그러나 뒷날 남성들은 여성들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많은 듯하다. 억압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았으리라. 그 난제를 해결하려다가 찾은 답이 사랑이다. 수메르에서는 ‘여자를 사랑하는 방법 말고는 없다’고 점토판에 남긴 것이다.
남성은 자력으로 임신과 출산을 못 한다. 여성은 자력으로 가능하다. 남성성은 유한하고 여성성은 영원한 것이다. 노자의 ‘곡신불사’처럼 말이다. 그래서 필자는 여성을 반인반신이라 여긴다. 그동안 반인반신 여성을 인간 남성이 잘못 대한 것이다. 땅에 짓밟힌 반인반신의 회복 운동이 페미니즘이다. 이쯤에서 길가메시 신화 몇 구절을 더 소개한다. 포도주의 여신 씨두리(라)의 한마디다.
“길가메시 여, (중략) 당신의 손을 잡은 아이들을 돌보고, 당신 부인을 데리고 가서 당신에게서 즐거움을 찾도록 해주세요. 이것이 인간이 즐길 운명인 거예요.”
이 말처럼 아이들과 아내를 잘 챙긴다면 그들은 전체 인구에서 얼마나 비중을 차지할까. 먼저 남녀로 구분하면 반반이다. 성인과 미성년으로 나눠도 반반이다. 두 이미지를 합치면 여성과 미성년이 4분의 3이다. 남는 건 4분의 1인 어른 남성들이다. 씨두리(라)는 25%가 75%의 행복을 잘 지켜주라 말했다. 그 말대로 이루어진다면 나머지 25%는 행복할까, 억울할까.
2021년은 건국 이래 처음으로 인구가 감소했다. 청년들이 결혼을 싫어하거나 결혼해도 출산을 꺼린 탓이다. 이러한 트렌드는 남성들보다 여성들이 더 지향한다. 주변에 골드미스들이 많은 게 그걸 말해준다. 여성은 사랑을 소중히 여긴다. 사랑을 위해 목숨을 버리기도 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잘 보여준다. 이 땅의 젊은 여성들은 ‘줄리엣 사랑’을 얻지 못해 혼자 살려는 게 아닐까. 이게 젊은 남성들 탓인가. 왜 우리 남성은 로미오처럼 여성을 사랑하지 못할까. 그건 사회적 분위기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이 성취되지 못하도록 가로막은 건 두 집안의 앙숙 관계 탓이다.
우리 사회는 빈부 차이가 심하다. 골이 깊다 보니 돌이킬 수 없는 앙숙처럼 비췬다. 그 탓에 대다수의 소외당하는 젊은 남녀가 맘 놓고 사랑할 사회적 분위기가 아닌 것이다. 그렇기에 젊은 남녀가 사랑보다는 혼자 살아가기에 급급하다. 아파트, 육아 비용, 사교육비 들이 그것을 말한다. 젊은이들은 좋은 일자리의 결핍도 겪어야 한다. 싼 주거 지역에서 살 때 받는 멸시도 견디기 힘들다. 그렇기에 일가를 이루어 수모당하며 사느니 혼자 살려는 사회적 분위기가 깊어지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부가 넘친다. 하지만 삶의 철학은 만 년 전 수메르보다 더 나은지 의심스럽다. 오히려 줄리엣 시대에 가깝다. 어떤 시대일지라도 권력이나 부는 중요하다. 그러나 인문학이 배제된 기득권은 사상누각이다. 인류를 위해 개발된 핵물리학에 인문학이 사라지면 원폭이나 수폭이 되는 사례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사랑이 결핍된 부도 마찬가지다. 소외당하는 MZ 세대가 풍선처럼 부푸는 것이다. 그러다 터진 게 인구 절벽이라 하겠다. 75%를 위한 사랑의 결핍이고 인문학의 부재가 부른 비극이다.
인문학은 19세기 즈음 자릴 잡고 20세기 들어 발달했다. 역사가 짧긴 하다. 21세기 우리에겐 75%를 사랑하는 인문학적 분위기가 절실하다. 25%가 사랑을 귀하고 소중하게 여기며 희생할 때 아름답고 행복한 삶이 되리라. 그 희생은 헛되지 않다. 돈보다 더 소중한 가치를 지녔다. 믿음, 사랑, 소망 중에 무엇이 으뜸인지 생각하자.
이 글은 기원전 8000년 수메르의 점토판에서 발견한 길가메시 신화 중 일부다. 신석기가 발현되는 시점이다. 이전에는 대부분 모계 사회였다. 상속이 딸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후 남성들이 부를 축적하며 상속을 아들에게 하려 했다. 권력가 남성들이 아들을 확보하려 모계 사회에 길든 여성들을 억압했다. 다부다처제를 일부다처제로 바꾸려 한 것이다. 친아들이 많을수록 좋은 게 가치로 자리 잡아갔다. 그러나 뒷날 남성들은 여성들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많은 듯하다. 억압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았으리라. 그 난제를 해결하려다가 찾은 답이 사랑이다. 수메르에서는 ‘여자를 사랑하는 방법 말고는 없다’고 점토판에 남긴 것이다.
2021년은 건국 이래 처음으로 인구가 감소했다. 청년들이 결혼을 싫어하거나 결혼해도 출산을 꺼린 탓이다. 이러한 트렌드는 남성들보다 여성들이 더 지향한다. 주변에 골드미스들이 많은 게 그걸 말해준다. 여성은 사랑을 소중히 여긴다. 사랑을 위해 목숨을 버리기도 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잘 보여준다. 이 땅의 젊은 여성들은 ‘줄리엣 사랑’을 얻지 못해 혼자 살려는 게 아닐까. 이게 젊은 남성들 탓인가. 왜 우리 남성은 로미오처럼 여성을 사랑하지 못할까. 그건 사회적 분위기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이 성취되지 못하도록 가로막은 건 두 집안의 앙숙 관계 탓이다.
우리 사회는 빈부 차이가 심하다. 골이 깊다 보니 돌이킬 수 없는 앙숙처럼 비췬다. 그 탓에 대다수의 소외당하는 젊은 남녀가 맘 놓고 사랑할 사회적 분위기가 아닌 것이다. 그렇기에 젊은 남녀가 사랑보다는 혼자 살아가기에 급급하다. 아파트, 육아 비용, 사교육비 들이 그것을 말한다. 젊은이들은 좋은 일자리의 결핍도 겪어야 한다. 싼 주거 지역에서 살 때 받는 멸시도 견디기 힘들다. 그렇기에 일가를 이루어 수모당하며 사느니 혼자 살려는 사회적 분위기가 깊어지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부가 넘친다. 하지만 삶의 철학은 만 년 전 수메르보다 더 나은지 의심스럽다. 오히려 줄리엣 시대에 가깝다. 어떤 시대일지라도 권력이나 부는 중요하다. 그러나 인문학이 배제된 기득권은 사상누각이다. 인류를 위해 개발된 핵물리학에 인문학이 사라지면 원폭이나 수폭이 되는 사례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사랑이 결핍된 부도 마찬가지다. 소외당하는 MZ 세대가 풍선처럼 부푸는 것이다. 그러다 터진 게 인구 절벽이라 하겠다. 75%를 위한 사랑의 결핍이고 인문학의 부재가 부른 비극이다.
인문학은 19세기 즈음 자릴 잡고 20세기 들어 발달했다. 역사가 짧긴 하다. 21세기 우리에겐 75%를 사랑하는 인문학적 분위기가 절실하다. 25%가 사랑을 귀하고 소중하게 여기며 희생할 때 아름답고 행복한 삶이 되리라. 그 희생은 헛되지 않다. 돈보다 더 소중한 가치를 지녔다. 믿음, 사랑, 소망 중에 무엇이 으뜸인지 생각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