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김향남 수필가
2022년 08월 08일(월) 00:30
1. 마을 앞에 강이 있었다.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었지만, 강은 언제나 그곳에 있었다. 그 강에서 여름이면 멱을 감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물속을 첨벙댔다. 처음에는 강가 얕은 곳에서 물장구나 치며 놀다가 차츰 헤엄을 칠 수도 있게 되었다. 바닥에 발을 대지 않고도 몸이 떠올랐고 물 위에 누워서 하늘을 볼 수도 있었다.

나는 등 밑을 간질이는 물 위에 누워 끝도 없는 하늘을 보는 것이 그렇게도 좋았다. 또래 친구들이 바로 옆에 있었지만, 물에 등을 대고 누울 때면 혼자라도 좋았다. 그럴 때면 왁자한 친구들의 소리는 아득히 멀고, 눈부셔 바라보기도 힘든 하늘의 태양이나, 저 건너 높이 솟은 검푸른 산마루나, 그 아래 층층이 내려앉은 자잘한 논밭들이 닿을 듯이 가까웠다. 꼬부라져 돌아가는 긴 황톳길도, 구름이 피워 내는 기묘한 형상들도 다 내 머리 위에 있었다. 나는 남실대는 강물 위에 조각배처럼 떠 있었다. 찰싹이는 물의 노래를 들으며 긴 꿈을 꾸곤 하였다.

2. 느티나무가 있었다. 우람하고 늠름한, 세상에서 가장 큰 나무였다. 바닥에서부터 두 갈래로 뻗어 올라간 나무는 높다란 동산처럼 부풀어 있었다. 옆에는 사방이 툭 터진 회관(유산각)이 있었다. 어른들은 그곳에서 낮잠을 자기도 하고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했다. 아름드리 나무는 우리가 차지했다. 멱을 감다 지치면 나무 아래서 놀았다. 가지 위로 올라가는 개미를 잡아다 땅 밑에 구멍 집을 만들어 주기도 하고, 자잘한 돌들을 주워 독잡기(공기놀이)를 하기도 했다. 그것도 시들해지면 다시 물속으로 들어갔다.

강기슭 낮은 언덕에서 풍덩 다이빙도 하고, 물귀신처럼 잠수 놀이도 하고, 한참씩이나 물 위에 누워 하늘의 구름과도 놀았다.

햇볕 쨍쨍한 날이면 누렁이도 봉선화도 축 늘어져 있기 일쑤였지만 우리는 가만있지를 못하였다. 덥다 싶으면 강물로 뛰어갔고, 다시 나무 아래 모여들어 젖은 몸을 말렸다. 여름 내내 이쪽저쪽을 오가느라 더울 틈도 없었고 심심할 새도 없었다.

3. 나무 위에선 매미가 울었다. 끊어질 듯 이어질 듯 그악스레 울었다. 매미의 울음에는 막무가내 떼쓰는 아이의 고집이 들어있는 것 같기도 하고, 뭔가 멈출 수 없는 갈망 같은 게 들어 있는 것도 같았다. 그 소리에는 기쁨도 있고 슬픔도 있고 어떤 각오도 배어 있는 듯했다. 몇 년 동안을 어둠에 갇혀 죽은 듯이 살았으나 이제 새 생명을 얻었노라 만천하에 고하는 소리였다. 한 점 작은 알이었다가 애벌레였다가 드디어 날개 돋친 매미가 되었노라, 깃털 하나 발톱 하나 건드리지 않고 온전한 자유를 얻었노라, 맴맴맴맴 목청껏 외치는 것 같았다.

나무 아래 매미의 허물이 떨어져 있었다. 매미 형태 그대로 빈껍데기였다. 제 몸을 빠져나온 매미는 벌써 저 위로 날아가고 없었다. 행여 살았을까, 조심조심 잡아 올린 매미는 텅 비어 있는 허깨비였다. 무늬만 살아 있는 탈각의 흔적이었다. 땡볕에 그을려 붉게 탄 내 어깨에도 그 흔적이 역력했다. 조각조각 허물이 벗겨지고 그 아래 희고 뽀얀 속살이 드러나면 몸도 마음도 한결 정결해진 느낌이었다.

4. 해질녘이면 방안에 모기장이 쳐졌다. 방안에 또 하나의 방이 생긴 것이다. 가슬가슬한 감촉에 바람도 숭숭 통하는 청록색의 방이었다. 그 방을 드나들 땐 최대한 몸을 낮춰 기어들다시피 해야 했다. 행여 모기가 따라올까 신속하고 정확한 동작이 필요했다.

청록의 방 안에는 엄마와 언니와 나 그리고 이야기가 있었다. 옛날 옛적에 산에 나무하러 간 할아버지도 있었고, 구수한 된장국을 끓여 내는 가난한 할머니도 있었다. 웃음도 있었고 눈물도 있었다. 달빛도 있었고 바람도 있었다. 모기장 안에는 모기만 없고 있을 건 다 있었다.

모기는 한사코 안을 넘봤지만 좀처럼 들어오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끝내 틈입에 성공한 모기 한 마리는 꼭 있기 마련이었다. 놈은 음흉했다. 낮에는 숨고 밤에는 나타나 고혈을 빨아먹고 다녔다. 문제는 그 집요함이었다. 한 번의 흡혈로는 양이 차지 않는지, 밤새도록 앵앵거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런 날의 아침은 더 빨리 오곤 했다. 대숲에선 새들이 조잘대고 감나무 위에선 매미가 왜장치는 소리. 벌써 아침이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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