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과 당신-김동하 소설가
2022년 07월 25일(월) 23:00 가가
소설가로 활동한 지 십 년 차가 됐다. 내게 소설은 여전히 어렵고 매력적이다. 소설만 그럴까. 살면서 부딪히는 문제 중 만만한 일은 없다. 나와 당신은 살며 숱한 문제들과 직면해 왔다. 운이 좋으면 주위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나도 당신도 대부분의 인생 문제에 대해 알아서 판단하고 결정해야 했다. 누군가 어른이 된다는 건 자기 결정과 그에 따른 책임을 지는 과정이라 말했기에 나와 당신은 하려던 말을 채 하지 못했던 순간도 있었다.
작가로서 내 작품이 더 많은 독자와 만나기를 바라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내 경우 흔히 말하는 히트작이 없다. 그래서일까. 데뷔작으로 화제를 불러 모으는 작가들을 보면 부럽고 초조하기도 했다. 작가로서의 내 재능에 대한 의심이 시작되고 우울한 기분에 사로잡히다 보면 내 지난날의 창작 활동이 무의미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이런 심리 상태가 비단 소설을 쓰는 나뿐일까? 당신도 그렇지 않을까?
작품 활동을 넘어, 삶에 있어 중심을 잡아 줄 뭔가가 필요했다. 비관적인 감정들이 삶을 대하는 태도가 될까 두려웠다. 인생도 작품 활동도 녹록하지 않던 순간에 내가 내린 결정은 아이러니했다. 나는 아직 한 권의 단행본도 펴내지 않은 시점에 전업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고 지금에 이르렀다.
내가 전업 작가가 되기로 마음먹은 건 전업 작가로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이 아니었다. 내게 소설가로서의 탁월한 재능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이십대 시절에 접었다. 전업 작가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건 내게 문학적 재능이 없음을 인정하는 과정에 가까웠다. 그러니 남들보다 더 오랜 시간을 투자해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무모하기만 한 그때의 선택으로 나는 여전히 소설을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공들여 쓴 원고를 발표할 때면 발가벗은 기분이었다. 매번 재능의 한계를 느끼고, 그게 노력의 부족은 아니었는지를 자문하고는 했다. 소설을 쓸 때 가장 두려운 상황은 스토리가 막히는 순간도, 인물의 형상화가 뜻대로 이뤄지지 않을 때도 아니었다. 작가로서의 나에 대한 의심이 들 때였다.
내가 써낸 소설이 어떤 가치가 있을까에 대한 자문이 드는 때. 그럴 때면 어린 시절 소설을 접했을 때를 떠올리고는 했다. 내게 소설은 어떤 의미일까. 내게 당신은 어떤 의미일까?
사실 이십대 시절에는 소설가가 아닌 다른 선택지도 많다고 짐짓 여유를 부리기도 했다. 실제로 이런저런 다른 일들도 병행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돌아보니 지금껏 놓지 않고 있는 건 글쓰기뿐이다. 내가 가장 잘할 수 있고 좋아하는 일 하나를 해오고 있는 셈이다.
내가 아직 독자이기만 할 때, 내 눈에 비친 소설가들은 인생에 대해 퍽 잘 아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그들은 어떤 어려운 질문에도 척척 답해줄 것만 같았다. 어쩌면 사람의 마음에도 정답이 있다고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결말에 이르기까지 에두르는 느낌의 소설을 볼 때면 원망하기도 했다.
‘인간 실격’은 나를 더 방황하게 했고,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심연에서 웅크리고 있던 나를 더욱 좁은 방으로 끌고 가기도 했다. 그런데 그러다 보면 그 끝에는 늘 당신이 있었다. 당신을 만나고 나면 신기하게도 경직됐던 마음이 누그러지고는 했다.
사실 나는 대화가 필요한 사람이었고 그 대화를 직접 나누는 데는 다소 서툰 사람이었다. 당신처럼 말이다. 그런 내게 소설을 읽는 행위는 매우 적극적인 소통 행위였는지도 모른다. 소설 속 인물들, 그리고 그 인물들 너머의 당신과 진공상태의 대화를 주고받았던 거다. 실은 소설을 쓰는 행위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니 당신도 부디 나와 같기를, 심연과 좁은 방 너머에서 나와 다시 만나기를, 그리해 당신과 내가 이제 막 말을 배운 아이처럼 온 힘을 다해 대화할 수 있기를.
공들여 쓴 원고를 발표할 때면 발가벗은 기분이었다. 매번 재능의 한계를 느끼고, 그게 노력의 부족은 아니었는지를 자문하고는 했다. 소설을 쓸 때 가장 두려운 상황은 스토리가 막히는 순간도, 인물의 형상화가 뜻대로 이뤄지지 않을 때도 아니었다. 작가로서의 나에 대한 의심이 들 때였다.
내가 써낸 소설이 어떤 가치가 있을까에 대한 자문이 드는 때. 그럴 때면 어린 시절 소설을 접했을 때를 떠올리고는 했다. 내게 소설은 어떤 의미일까. 내게 당신은 어떤 의미일까?
사실 이십대 시절에는 소설가가 아닌 다른 선택지도 많다고 짐짓 여유를 부리기도 했다. 실제로 이런저런 다른 일들도 병행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돌아보니 지금껏 놓지 않고 있는 건 글쓰기뿐이다. 내가 가장 잘할 수 있고 좋아하는 일 하나를 해오고 있는 셈이다.
내가 아직 독자이기만 할 때, 내 눈에 비친 소설가들은 인생에 대해 퍽 잘 아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그들은 어떤 어려운 질문에도 척척 답해줄 것만 같았다. 어쩌면 사람의 마음에도 정답이 있다고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결말에 이르기까지 에두르는 느낌의 소설을 볼 때면 원망하기도 했다.
‘인간 실격’은 나를 더 방황하게 했고,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심연에서 웅크리고 있던 나를 더욱 좁은 방으로 끌고 가기도 했다. 그런데 그러다 보면 그 끝에는 늘 당신이 있었다. 당신을 만나고 나면 신기하게도 경직됐던 마음이 누그러지고는 했다.
사실 나는 대화가 필요한 사람이었고 그 대화를 직접 나누는 데는 다소 서툰 사람이었다. 당신처럼 말이다. 그런 내게 소설을 읽는 행위는 매우 적극적인 소통 행위였는지도 모른다. 소설 속 인물들, 그리고 그 인물들 너머의 당신과 진공상태의 대화를 주고받았던 거다. 실은 소설을 쓰는 행위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니 당신도 부디 나와 같기를, 심연과 좁은 방 너머에서 나와 다시 만나기를, 그리해 당신과 내가 이제 막 말을 배운 아이처럼 온 힘을 다해 대화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