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역 기찻길에서 만난 고독-박용수 광주동신고 교사·수필가
2022년 07월 17일(일) 22:00
페달을 밟는다. 내 힘으로 만든 동력에 의해 나는 나아간다. 다리 힘줄이 팽팽해지고 팔 근력도 단단해진다. 피부를 뚫고 땀이 송송 솟는다. 오르막길에서는 터질 듯한 심장도 ‘러너스 하이’(달릴 때 밀려오는 행복감)에 이르면 내 등 뒤의 고독도 절로 신명이 난다. 내리막길에서 무한 질주, 자전거는 풍경 못지않게 바람을 헤치고 가는 즐거움이 단연 최고다. 몸은 팽팽해지고 정신적 에너지는 무한 상승한다. 그래서 자전거를 탄다.

자전거를 타면 꼭 들러야 할 쉼터가 있다. 바로 정자(亭子)다. 정자는 라이더들에게 잠시 쉬어 가는 인생 간이역이다. 광주에서 담양으로 옛날 광주선을 따라간다. 광주역에서 출발한 열차는 대인시장에서 나무전거리를 지나 왼쪽으로 고개를 꺾어 농산물시장 뒤편으로 도동고개를 넘어간다. 망월역, 장산역, 증암천 철교를 거쳐 마항역과 담양역에 이른다. 1922년 12월 1일 영업 개시하여 1944년 11월 1일 폐지된 된 역들이다. 일제는 1942년 하와이·미얀마·태국· 베트남 등지에서 태평양전쟁을 치르며 전쟁 물자로 철로까지 뜯어 공출한 것이다. 숟가락 밥그릇까지 공출하던 때에 철로가 온전할 리 없다. 담양 지역의 농산물을 수탈해 가기 위해 가설한 광주선은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1969년 광주선 복원 사업을 시작하였고 선로를 복구하고 교량을 다졌지만, 어찌 된 연유인지 중단되고 만다. 그렇게 또다시 60여 년이 흐른 지금, 철로나 역사는 흔적조차 없다. 다만 망월역은 복다우 마을이, 장산역은 쌍교 직전 원유동 마을 길가에 자리 잡은 여행사가 예전 역 터였다. 봉산의 마항역 또한 창고가 들어섰고, 담양역 가는 오례천 철교만이 여전히 이곳이 철로였음을 확연히 증명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유용한 것만이 살아남는다.

담양까지 망월·장산·마항 간이역의 역사를 아는 현지인은 많지 않았다. 마을에서 사람 만나기도 어려웠고 또 만난 노인조차 어렸을 때 들었거나 흔적이 있었다고 어렴풋이 회고할 뿐 자세히 아는 이는 드물었다. 간혹 정자에서 만난 노인은 한결같이 고독하단다. 정자도 하나고 노인도 하나, 배고픈 시절이나 군대 이야기만 되뇔 뿐 40년대에 태어난 그들에게 담양행 기차는 신기루 같은 이야기일 뿐이다.

“십 년 전만 해도 정자에 노인들이 꽉꽉 찼어, 어디 구석이나 차지했간디, 지금이사 이 넓은 정자에 딸랑 나 혼자 그만” 마항역에서 만난 촌로의 하소연이다.

정말 인파로 가득했을 마을 앞 정자에는 한더위인데도 사람이 없다. 어느 마을이건 이 정자를 짓기 위해 주민들이 십시일반 했다는 표지석에 이름들은 수백 명도 부족해서 모두 새기지 못했는데 그 많던 이름, 지금이라도 호명하면 불쑥불쑥 나타날 것 같은 그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가고 없는가.

담양은 광주 근거리다. 가사 문학의 산실은 담양이고 그 가사의 뿌리는 정자이다. 정자마다 정치와 외교, 동서양 철학을 운운하고, 사랑가를 부르고, 신세 한탄도 하고, 하늘의 별을 보고 운명도 예견했을 사람들, 정자를 잃고 문학을 잃고 역사와 삶의 뿌리를 잃고 끝내 우리도 소멸된 기차, 고독이 되지 않을까. 기차가 사라진 길목 정자에는 여름 말매미들만 기적을 울리듯 쩌렁쩌렁 울 뿐 마을은 고요하다 못해 적적하다. 소살소살 흐르던 면앙정 앞 물결도 오늘 따라 소멸소멸 흐르는 것 같다.

원래 고독은 외로움과 달리 인간의 영혼을 더 깊고 푸르게 만든다. 그러나 그것도 어디까지 주변에 누군가 있다는 전제 하에 가지는 사치인지도 모른다. 아무도 없는 시골 정자 앞을 지나칠 때마다 마주친 ‘고독’에게 차마 말을 걸 수가 없었다. 그것은 찬란하고 눈부신 고독이 아니라 시퍼렇게 멍이 든 진짜 외로움이었다.

자전거 페달을 밟는다. 바퀴는 텅 빈 정자 몇 개를 연거푸 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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