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하림의 차이나 4.0] 타이완과 타이완 사람들 (1)-조선대 중국어문화학과 명예교수
2022년 07월 12일(화) 00:45 가가
갈수록 타이완 해협의 파고는 높아가고 풍랑은 거세지고 있다. 지금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 국제사회의 시선이 크림반도로 옮겨갔지만, 그전에는 미·중 갈등이 격화되면서 이 불똥이 타이완 해협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가 국제사회의 관심사였다. 타이완과 중국의 관계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는 예상하기 어려운 일이나 타이완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다.
민진당의 천수이삐엔이 총통에 당선되어 타이완에서 최초로 정권이 교체된 2000년 이후의 일이라고 기억한다. 5·18기념재단에서 타이완의 ‘2·28’ 기념관 관장을 초빙하여 강연을 개최하는데 통역을 해 달라고 연락이 왔다. 일본 패망으로 2차 대전이 종결된 이후 타이완에 들어온 국민당 군대가 2만~3만 명의 양민을 학살한 1947년의 ‘2·28’ 사건을 말하기에는 지면이 제한되어 있으니, 권력이 양민을 학살한 제주의 ‘4·3’과 유사한 성격이라고 간략하게 규정하고자 한다.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아 안타깝지만, 2·28 기념관 관장은 60대 후반을 넘긴 여성 변호사였다. 부친이 2·28 사건 당시 행방불명되어 아직까지 유해도 찾지 못하고 있으며, 부친의 실종 이후 본인은 독신으로 지내면서 부친의 일과 2·28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에 일생을 바쳐 왔다고 했다. 그분의 일생은 개인적 비극과 역사적 비극이 얽혀 있는 안타까운 시간의 연속이었던 듯했다.
여기까지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는데 강연에 들어갈 준비를 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그분은 자신은 ‘국어’(중국에서 ‘푸퉁화’라고 하는 중국어를 타이완에서는 국어라 지칭)가 서투르기 때문에 ‘민난화’(주로 푸젠성 남부와 타이완에서 사용하는 방언)로 강연하겠다는 것이었다. 타이완에 잠깐 거주할 때 민난화를 들어는 보았으나, ‘중국어’ 습득에만 집중했던 나에게 민난화는 생면부지의 언어였다. 민난화를 모르니 국어를 사용하면 안되겠느냐고 다시 묻자, 그분은 정색하면서 자신의 국어 수준은 강연할 정도가 아니며 외성인들이 사용하는 국어는 타이완의 국어가 아니라고 한 마디로 잘라 말했다.
시간은 다가오고 재단 관계자는 무슨 일이냐고 물어오는데 난감한 일이었다. 관계자는 애가 타서 중국어나 민난화나 차이가 얼마나 크겠냐고 하면서 통역 실력을 의심하는 눈초리였다. 민난화(Fukenese)나 광뚱화(Cantonese)는 중국어(Mandarin)와는 거의 다른 언어라는 설명은 변명일 뿐이었다. 다행히 직원 한 분이 홍콩 생활 경험이 있어서 광뚱화를 예로 설명하면서 문제는 진화되었다. 시간이 지체되자 관장은 나중에는 민난화 대신 일어로 강연하겠다고 말했다. 다행히 강연 원고가 있어서 결국 그분은 민난화로 말하고 나는 원고를 통역하는 선에서 결정되었다.
이 일은 커다란 충격이었다. 심지어 중국어가 아닌 일어를 사용하겠다는 주장은 과연 무엇일까? 50년에 달하는 일제 강점기의 역사를 잊어버렸단 것인가? 민족적 자존심도 없단 말인가? 국민당의 계엄을 위시한 가혹한 독재 통치에 대한 타이완 사람들의 저항과 희생, 지난한 민주화 투쟁, 민진당 창당과 정권교체 등의 험난한 과정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일어라니? 일본보다 국민당이 더 증오스러운가?
속된 말로 ‘그들과는 말도 섞지 않겠다’는 그 결연함에는 깊은 비장감이 담겨 있었다. 타이완 인구의 95%를 점유하는 이들은 대부분 명 말기와 청 초기에 복건성 남부, 광동성 동부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다. 이들은 민난화, 광뚱화를 사용하며 타이완에서 이백 년 이상 살아왔다. 본성인이라 칭하면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중화민국이나 청나라에 두고 있지 않다. 국어는 1949년 국민당이 대륙에서 후퇴할 때 함께 온 외성인들이 사용하는 언어일 뿐이라고 간주한다. 이들은 공산당도 국민당도 다 거부한다. 타이완의 독립을 추구하고 이를 실현하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이들을 단순히 반통일세력이라 치부하기에는, 오랜 역사와 문화가 있고 그동안의 고통과 희생이 너무 크며 정치적 갈등을 넘어서는 정체성의 문제가 내재해 있다. 지금은 아마 그분도 유명을 달리했을 것이다. 타이완 독립이라는 꿈을 접지 않은 채.
시간은 다가오고 재단 관계자는 무슨 일이냐고 물어오는데 난감한 일이었다. 관계자는 애가 타서 중국어나 민난화나 차이가 얼마나 크겠냐고 하면서 통역 실력을 의심하는 눈초리였다. 민난화(Fukenese)나 광뚱화(Cantonese)는 중국어(Mandarin)와는 거의 다른 언어라는 설명은 변명일 뿐이었다. 다행히 직원 한 분이 홍콩 생활 경험이 있어서 광뚱화를 예로 설명하면서 문제는 진화되었다. 시간이 지체되자 관장은 나중에는 민난화 대신 일어로 강연하겠다고 말했다. 다행히 강연 원고가 있어서 결국 그분은 민난화로 말하고 나는 원고를 통역하는 선에서 결정되었다.
이 일은 커다란 충격이었다. 심지어 중국어가 아닌 일어를 사용하겠다는 주장은 과연 무엇일까? 50년에 달하는 일제 강점기의 역사를 잊어버렸단 것인가? 민족적 자존심도 없단 말인가? 국민당의 계엄을 위시한 가혹한 독재 통치에 대한 타이완 사람들의 저항과 희생, 지난한 민주화 투쟁, 민진당 창당과 정권교체 등의 험난한 과정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일어라니? 일본보다 국민당이 더 증오스러운가?
속된 말로 ‘그들과는 말도 섞지 않겠다’는 그 결연함에는 깊은 비장감이 담겨 있었다. 타이완 인구의 95%를 점유하는 이들은 대부분 명 말기와 청 초기에 복건성 남부, 광동성 동부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다. 이들은 민난화, 광뚱화를 사용하며 타이완에서 이백 년 이상 살아왔다. 본성인이라 칭하면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중화민국이나 청나라에 두고 있지 않다. 국어는 1949년 국민당이 대륙에서 후퇴할 때 함께 온 외성인들이 사용하는 언어일 뿐이라고 간주한다. 이들은 공산당도 국민당도 다 거부한다. 타이완의 독립을 추구하고 이를 실현하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이들을 단순히 반통일세력이라 치부하기에는, 오랜 역사와 문화가 있고 그동안의 고통과 희생이 너무 크며 정치적 갈등을 넘어서는 정체성의 문제가 내재해 있다. 지금은 아마 그분도 유명을 달리했을 것이다. 타이완 독립이라는 꿈을 접지 않은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