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 ‘이자’-김향남 수필가
2022년 07월 10일(일) 22:30 가가
나는 그를 ‘이자’(李子)라고 부른다. 그는 ‘옥(鈺)’이라는 이름 외에도 문무자, 매화외사, 화서외사, 경금자, 도화유수관주인 같은 근사한 이름을 몇 개나 더 가지고 있지만, 나는 그의 성씨를 따라 ‘이자’라고 한다. ‘이자’는 누런 책갈피 속에 살고 있다. 우연히 들어간 그의 집은 누에가 실을 토해 내듯, 구멍 속에서 샘물이 솟아나듯 유려하고 아름다웠다. 건네는 말들 또한 맑고 신선했으며 정감이 넘쳤다. 그는 고리타분할 것이라는 내 관념을 일거에 날려 버렸다.
가끔 ‘이자’와 산책을 하기도 하고 차를 타고 멀리 여행을 가기도 한다. 그와의 동행은 거리낄 것이 없다. 시간도 장소도 구애받지 않는다. 희대의 바이러스도 우릴 따라오지는 않는다. 1760년생인 그는 나보다 200살도 더 많지만 언제나 내 나이쯤에 머물러 있다. ‘이자’는 꽃을 좋아하고 물을 좋아하고, 그리고 글쓰기를 좋아한다. 나는 그의 애독자다. 그의 글을 읽으며 그의 고민과 번뇌, 그의 삶과 꿈, 그의 유머, 그가 사는 세상을 만난다.
오늘 우리는 바다가 보이는 멋진 곳에서 점심을 먹고 산 위에 올라 망망하게 펼쳐진 섬들을 바라보며 하루를 보내기로 하였다. ‘이자’는 흰 두루마기에 갓을 쓰고 긴 담뱃대를 들고 있다. 어디를 가든 같은 복장이다. 차를 타고 소풍을 가는데도 그의 차림새는 변함이 없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허리춤에 괴나리봇짐이 하나 얹어져 있는 정도랄까? 봇짐 속에는 좁쌀책이나 붓, 호패 따위가 들어있을 것이다. 아, 노잣돈도 얼마쯤 챙겼으려나?
‘이자’를 생각하면 외골수, 마이너리티, 변방, 소소함, 하찮음, 연약함… 이런 단어들이 떠오른다. 존재, 중심, 차이, 탈주 같은 말들도 그를 떠오르게 한다. 그는 청운의 꿈을 안고 성균관에 들어가 과거를 준비했다. 한미한 집안을 위해서도, 자신의 이름을 위해서도 그 길은 꼭 가야 했다. ‘이자’는 읽고 쓰고 읽고 쓰고 최선을 다했다. 그렇다고 세상이 그의 편은 아니었다. 왕으로부터는 몇 번이나 글이 ‘괴상하다’는 지적을 받아 반성문을 써야 했고 심지어 유배에 처하기도 했다. 더러 대단하다는 찬사를 듣기도 했고, 스스로 이만하면 됐다 싶을 때도 없지 않았지만, 어쩐지 그의 앞길은 순탄치가 않았다.
‘이자’의 글쓰기는 기존의 규범을 벗어난 낯설고 새로운 언어들로 가득했다. 하여 문장의 격식뿐 아니라 자칫 중심을 무너뜨릴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 권력자의 판단이었다. 그의 글쓰기는 감정의 절제를 요구하는 당시의 이념과 정면으로 배치되었으며, 언어 사용의 일탈과 내용의 파격 또한 도(道) 벗어난 것으로 치부되었다. ‘이자’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완고하리만치 외골수적 의식에다 내세울 조상도, 뒷받침해 줄 배경도 없는 그는 변방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이자’는 결국 출세의 꿈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더욱 성실하게 글을 썼다. 세심하게 관찰하고 정성껏 기록하는 것이 그의 일과였다. ‘이자’는 너무 흔하고 자잘해서 별 가치가 없어 보이는 것들에도 깊이 천착했다. 흔하디 흔한 풀과 나무, 꽃, 채소, 과일, 새, 벌레, 심지어 사람들의 담배 피우는 모습까지 눈이 비친 모든 것에 지극한 관심을 두었다. 그는 본래 도둑이건 충신이건 기생이건 열녀건 그 우열을 가리지 않았으며, 대상에 차등을 두거나 가치판단에 얽매지 않았다. 세상만사 다채로운 실상을 참되게 구현하는 것만이 오롯한 관심사였다.
요컨대 ‘이자’는 기존의 시각이 놓치고 있는 미세한 세계의 구체적 형상을 통해 그것들의 차이를 발견해 내고자 하였다. 세상은 하나의 중심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중심이 있나니, 그 중심들과 그 차이들의 합이 곧 세상을 이룬다. 보라.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꽃들도 붉은 꽃이 있고 흰 꽃이 있으며, 천상의 화음도 각각의 악기들이 내는 서로 다른 소리의 합이다. 전각에 좌정하신 나한들을 바라보매 그 수가 오백이나 되지만, 모두 각각의 얼굴이고 제각각의 표정들이지 않은가.
이윽고 바다다! 생각만으로도 좋지만, 갈매기 끼룩대는 부두에 서니 진짜 좋다. 팔을 벌려 심호흡을 해본다. 물새처럼 날갯짓도 해본다. 그가 “도(道)는 모두 여기에 있도다”라고 했듯이, 바다에는 모든 것이 모여 있다. 바다는 부드럽고 유유하며 깊고 그윽하다. 성난 듯 포효하다가도 어느새 잔잔하고 고요해진다. 덕이 있는 자에게 대중이 귀의하듯이 바다는 만물을 받아들여 관용으로써 다스린다고 했던가. 갈매기 날고 물결 찰랑대는 오후, 누런 책갈피 속 ‘이자’의 말을 경청하고 있다.
‘이자’의 글쓰기는 기존의 규범을 벗어난 낯설고 새로운 언어들로 가득했다. 하여 문장의 격식뿐 아니라 자칫 중심을 무너뜨릴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 권력자의 판단이었다. 그의 글쓰기는 감정의 절제를 요구하는 당시의 이념과 정면으로 배치되었으며, 언어 사용의 일탈과 내용의 파격 또한 도(道) 벗어난 것으로 치부되었다. ‘이자’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완고하리만치 외골수적 의식에다 내세울 조상도, 뒷받침해 줄 배경도 없는 그는 변방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이자’는 결국 출세의 꿈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더욱 성실하게 글을 썼다. 세심하게 관찰하고 정성껏 기록하는 것이 그의 일과였다. ‘이자’는 너무 흔하고 자잘해서 별 가치가 없어 보이는 것들에도 깊이 천착했다. 흔하디 흔한 풀과 나무, 꽃, 채소, 과일, 새, 벌레, 심지어 사람들의 담배 피우는 모습까지 눈이 비친 모든 것에 지극한 관심을 두었다. 그는 본래 도둑이건 충신이건 기생이건 열녀건 그 우열을 가리지 않았으며, 대상에 차등을 두거나 가치판단에 얽매지 않았다. 세상만사 다채로운 실상을 참되게 구현하는 것만이 오롯한 관심사였다.
요컨대 ‘이자’는 기존의 시각이 놓치고 있는 미세한 세계의 구체적 형상을 통해 그것들의 차이를 발견해 내고자 하였다. 세상은 하나의 중심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중심이 있나니, 그 중심들과 그 차이들의 합이 곧 세상을 이룬다. 보라.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꽃들도 붉은 꽃이 있고 흰 꽃이 있으며, 천상의 화음도 각각의 악기들이 내는 서로 다른 소리의 합이다. 전각에 좌정하신 나한들을 바라보매 그 수가 오백이나 되지만, 모두 각각의 얼굴이고 제각각의 표정들이지 않은가.
이윽고 바다다! 생각만으로도 좋지만, 갈매기 끼룩대는 부두에 서니 진짜 좋다. 팔을 벌려 심호흡을 해본다. 물새처럼 날갯짓도 해본다. 그가 “도(道)는 모두 여기에 있도다”라고 했듯이, 바다에는 모든 것이 모여 있다. 바다는 부드럽고 유유하며 깊고 그윽하다. 성난 듯 포효하다가도 어느새 잔잔하고 고요해진다. 덕이 있는 자에게 대중이 귀의하듯이 바다는 만물을 받아들여 관용으로써 다스린다고 했던가. 갈매기 날고 물결 찰랑대는 오후, 누런 책갈피 속 ‘이자’의 말을 경청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