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송정역과 판소리꾼 임방울] 항꾸네 기차에 올라타고…설움의 경적이 울렸다
2022년 06월 28일(화) 23:30
1913년 들어선 송정리역…‘남행열차’ 타고 오르내리던 소리꾼 임방울
민주화 비슷한 그리스, 레지스탕스 담은 민중노래 ‘기차는 8시에 떠나네’

송정리 출신 소리꾼 국창 임방울의 한 서린 레퍼토리는 민중들에게 큰 위로였다. 소리꾼이 주인공인 영화 ‘서편제’가 촬영됐던 영광의 당산나무.

“비 내리는 호남선 남행열차에 흔들리는 차창 너머로 빗물이 흐르고 내 눈물도 흐르고 잃어버린 첫사랑도 흐르네”

남행열차의 목적지는 목포. 중간역으로 송정역이 철로를 이으며 서 있었다. 지금 이름은 광주송정역. 남행열차에 탄 광주 외곽권 사람들의 상그레 설렌 표정들. 그리고도 전라도 남녘 사람들은 동향 사투리만 듣게 돼도 대번 반가웠다. 기차역에선 가지가지 만남과 작별들이 있다. 한 인생의 도전과 실패까지를 기차역은 죄다 알고 있겠지. 청운의 꿈을 품고 객지로 나갔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축 늘어진 어깻죽지로 돌아오는 청춘에게도 고향의 지명은 따스하고 아늑하게 안아준다. “비 내리는 호남선 마지막 열차 기적소리 슬피 우는데 빗물이 흐르고 내 눈물도 흐르고 잃어버린 첫사랑도 흐르네... 만날 순 없어도 잊지는 말아요 당신을 사랑했어요...”

제프 다이어의 ‘인간과 사진’이란 책을 보았는데, 사진작가 매트 스튜어트의 말. 여행을 하는 사람으로 지녀야 할 질문이나 대답 등을 적은 쪽지 가운데 이런 경구가 딱 있더군. “인류라는 급류의 물살과 회오리에 운반되는 게 아니라 (호랑이 등에) 올라타는 그 덧없는 즐거움을 느끼게 되길.” 기차를 호랑이 등이라 한다면, 누군가 그 등에 올라타서 천하를 호령하고 다니는지도 모른다. 덧없을지라도 즐거움을 느끼면서, 기차여행은 때마다 반복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이 되어야 옳다. 우리네 이동 여행이 고작 운반되고 전송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광산구청 인근의 국창 임방울 선생 생가터.


송정리역이 처음 들어선 것은 1913년. 서울까지 가기 앞서 목포와 송정이 연결되었다. 1914년에 송정에서 대전이 연결되고, 서울과 평양, 신의주까지 연결되었다. 1922년엔 송정리역에서 광주역까지가 연결되어 이를 전남선이라고 했다. 1930년엔 광주와 여수를 오가는 경전선이 생겼는데, 달그닥달그닥 마차를 타듯 느린 속도였으나 가지가지 해산물을 실어날랐다. 마침 학동에 기차역이 생겼는데 이름은 신광주역. 1938년에 이르러 남광주역이라고 이름을 새로 달았다. 대합실의 톱밥 난로 앞에 옹기종기 모여 한담을 나누거나 샛잠을 자는 사람들을 보고서 시인 곽재구는 ‘사평역에서’라는 시를 남겼다. 이 남광주역은 역이 폐쇄되며 역사속으로 사라졌는데, 시방은 그 땅밑으로 지하철이 달리고 있다.

2009년 송정리역은 광주송정역으로 이름을 바꿨다. 광주가 주변 군 단위를 통합하고 광역시로 커나간 이후 송정리역으로 불리는 것에 불편과 혼란이 있었다. 그러다가 2015년 고속열차가 들어오면서 명실상부 광주의 관문 기차역으로 우뚝 섰다. 과거 이 기차역에서 검문검색을 피해 광주를 몰래 떠나야만 했던 정치적 수배자들이 있었다. 한편 상경 투쟁을 위해 철로를 가로막고 기차에 오른 전대협 한총련의 자매형제간 남대협과 남총련 학생들이 있었다. 그 길로 철창에 잡혀 들어간 청년은 햇볕을 쬐지 못하고 모진 고문과 인권유린을 당해야 했다.

그리스의 기차역에서도 그런 사연의 이야기를 들었다. 수도 아테네역, 남으로는 고린토역, 북으로는 데살로니키역. 우리처럼 민주화 과정의 수난사가 비슷한 그리스. 민중노래를 ‘렘베티카(Rembetika)’라고 하는데, ‘렘베트’란 밑바닥 인생을 뜻하는 터키의 옛말이다. 터키에서 강제 이주 당한 그리스인 혈통들이 항구도시 데살로니키와 피레우스에 정착하게 되는데, 여기에서 전통악기 부주키를 연주하며 한과 슬픔의 노래를 드라마틱한 창법으로 불렀다는 게 렘페티카 기원의 정설. 그 가운데 새로운 기풍이라는 네오 키마(Neo Kima)를 주도한 작곡가 미키스 테오도라키스에 이르러선 온 세계를 매료한 노래가 되었다. 테오도라키스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비롯 발레음악, 영화음악을 만들고, 대중가수 멜리나 메르꾸리니, 마리아 파란투리, 하리스 알렉시우, 사비나 야나투, 소프라노 아그네스 발차를 비롯 수많은 뮤즈들에게 그의 노래를 부르도록 허락했다. 우리가 잘 아는 노래 ‘기차는 8시에 떠나네“는 2차 세계대전시 레지스탕스를 담은 노래였는데, 민주화 과정에서 길을 떠나는 청년의 심경을 담은 노래로도 해석되었다. 군사정권의 표적이었던 작곡가는 이러한 해석 또한 부정하지 않았다.

한국과 민주화 수난사가 비슷한 그리스에서는 ‘노래는 탱크보다 강하다’고 말했던 미키스 테오도라키스 등이 작곡한 민중노래가 울려퍼진다.
“카테리니행 기차는 8시에 떠나간다네.

11월은 내 기억에 영원히 남을 것이네.

우연히 레프테리에서 우조(술)를 마시는 당신을 보았네.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들은 마치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이젠 밤이 지나도 다시 돌아오진 않을 것이네.

기차는 당신을 홀로 두고 멀리 떠났네.

당신은 남아 카테리니역에서 서성거리겠지.

마음을 칼로 베는 듯 아픔을 안은 채로

이 뿌연 안개속에서 홀로 남아 서성이겠지.”

언젠가 테오도라키스는 이런 인터뷰를 했다. “노래는 탱크보다 강합니다. 탱크는 몇 년간은 승리할 수 있지만, 시간이 흐르면 녹이 슬고 말지요. 군부 독재자들의 탱크가 녹슬 때쯤이면 내 음악은 입에서 입으로 퍼져 온 세상에 번져있을 것입니다. 노래는 이름없이 잊혀진 이들을, 강제로 헤어진 이들을, 그리고 억울하게 죽은 자들까지 살아나게 할 테니까요.”

식민지 수탈의 창고였던 1929년 송정리역. 나라 잃은 설움의 곡소리 같은 기차 경적이 울렸다. 기차를 타고 서울로 상경한 송정 사람 임방울은 ‘쑥대머리’로 히트를 치고, 음반이 무려 120만장이 불티나듯 팔린 판소리계의 스타가 되었다. 그이가 즐겨 부른 소리는 춘향가의 ‘쑥대머리’ 말고도 ‘이별가’, ‘옥중가’, ‘옥중상봉가’ 등 한(恨) 서린 레퍼토리였다. 승근이라는 본명보다 방울이란 애칭으로 불린 명창은 1904년 광산군 송정읍 수성리에서 태어나 도산리로 이주했다. 아버지 대를 이어 소리꾼이 된 임방울은 “함평 천지 늙은 몸이 광주 고향을 보랴허고 제주 어선 빌려 타고 해남으로 건너갈제 흥양의 돋은 해는 보성의 비쳐있고...” ‘호남가’를 속으로 뇌이면서 서울행 기차에 수시로 몸을 실었다. 기차를 통해 서울을 가고, 훗날 부산을 거쳐 일본에 녹음 유랑을 떠났다. 그 명성이 나라 밖까지 알려지더니 어느새 ‘국창’이 되어 있었다.

판소리는 혼자서 모든 걸 감당한다. 오페라는 배우들이 필요하지만 판소리는 어사또가 되었다가 춘향이나 향단이가 되었다가 갑자기 장모가 되고 별주부가 되고 용왕이 되기도 하고 심봉사가 되어야 한다. 공연 조력자인 고수와 놀 때는 공연에 몰입했던 청중들의 혼을 되돌려주기도 한다. 임방울의 어머니는 무속인이었는데, 판소리와 가장 유사하다고 해야 할 ‘굿판’을 떠올려보면 종합예술무대를 짐작하는데 수월하겠다. 남도의 소리가락 서편제, 동편제, 중고제가 모두 기차를 타고 서울로 전국 각지로 뻗어가면서 순회공연을 펼치게 했다. 나라 잃은 설움을 위로하고, 이를 윽 물고 버티게 만들고, ‘암행어사 출두요!’ 하면서 탐관오리 침략자들에게 저항하게도 만든 판소리.

한국과 민주화 수난사가 비슷한 그리스에서는 ‘노래는 탱크보다 강하다’고 말했던 미키스 테오도라키스 등이 작곡한 민중노래가 울려퍼진다.
몇 해 전부터 나는 오월 투사 윤상원 기념관(윤상원 민주커뮤니티센터)의 준비 자문위원장을 맡고 있다. 회의차 광산구청에 갔다가 훌쩍 임방울 명창의 생가를 찾아갔다. 도로 정비 사업을 하는 통에 과거의 그 꼬불꼬불하고 퇴락한 골목의 맛은 더 이상 나진 않았다. 하지만 누군가 배고픈 길냥이를 위해 사료와 함께 물도 한 바가지 떠놓은 광경. 인심, 사랑이 꾸려가는 이 공동체는 골목을 타고 넘어 광주 전역을 끌어안는다. 이것이 바로 애환을 나누는 우리네 삶의 노래다.

계면조 육자배기목의 구슬픈 가락들이 흐르는 시대 현실. 한없이 어둡고 캄캄한 시절을 건너온 사람들에 의해 불리던 노래들. 철길을 타고 두 가락이 흘러가고 나머지 가락들은 어디를 떠도는 것일까. 윤년 윤달에 수의를 구해 놓으면 오래 산다던데, 윤년 윤달을 놓쳤던지 아니면 수의 한벌 장만하지 못할 형편이었던지 임방울은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1961년 58세를 일기로 서울의 구석진 셋방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리스의 기차는 8시에 떠나고, 남행열차를 타고 오르내리던 임방울은 58세에 떠났지만 소리꾼을 기다리던 광주송정역은 그 자리에 그대로 아직 서 있다. 판소리에는 시김새라는 게 있다. 시김새는 기교라 바꿔 말할 수 있겠다. 시김새는 곡선이어서 서사의 중간중간을 해학과 능청의 말로 메운다. 토막소리를 보통 듣지만 완창은 길며 색다르다. 임방울과 형님 동생으로 지냈던 박동진 명창이 52세에 8시간 동안 춘향가를 불러 오롯한 완창을 들려주었다. 임방울의 후예들이 지금도 못다 이룬 그의 숙원을 완성해내고 있다. 광주송정역에 서면 꿈길 밖에는 길이 없다는 듯 철로가 ‘우리네 가야할 길’을 어슴푸레 보여준다. 그러나 막상 기차에 오르면 더 이상 꿈길이 아니며 ‘앞’은 ‘뒤’를 두고서 길을 서두른다. 이 역에 다시 돌아올 때 쯤엔, 성숙하고 뿌듯한 얼굴이길.

임의진

시인. 화가. 사진도 찍는다. ‘참꽃 피는 마을’, ‘버드나무와 별과 구름의 마을’, ‘여행자의 노래 1-10’, ‘심야버스’ 등의 수필집, 시집, 음반 등을 펴냈으며 EBS 세계테마기행, 세계견문록 아틀라스 등에 종종 출연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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