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렁이를 위한 탄식-김향남 수필가
2022년 06월 12일(일) 21:30
길을 걷다가 갑자기 펄쩍 뛰거나 비명을 질러본 적 없나요? 살다 보면 놀랄 일이 어디 한두 가지겠습니까마는 그중 지렁이라는 놈도 한몫을 하지 않나 싶습니다. 덩치가 큰 것도 아니고 몸이 날랜 것도 아니고 무슨 위협을 가하는 것도 아니건만 놈을 보면 사람들은 대뜸 놀라기부터 하니까요.

엊그제는 어디 일을 보러 공원 길을 걸어가는데 길바닥이 시커멓게 보일 정도로 지렁이들이 널려 있는 거예요. 한두 마리가 아니었어요. 이미 납작해져 버린 놈도 있고 아직 꿈틀거리는 놈도 있고, 그렇게 많은 지렁이를 보기는 드문 일이었어요. 처음엔 악, 하고 비명이나 지른 정도였는데 갈수록 뭔가 이상한 생각이 들었어요. 무슨 일일까? 어쩌자고 단체로 이렇게 길바닥을 나뒹굴고 있는 걸까? 혹시 비가 온다는 예보라도 있었던 것일까? 모처럼 샤워도 하고 숨구멍도 틔우고 싶었을까? 아니면 땅 밑의 삶에 그만 넌더리가 나고 말았을까? 죽음을 불사하고라도 한 번쯤은 땅 위의 삶을 살아보고 싶었을까? 그리하여 일제히 어서 빨리 세상 밖으로 가보자, 서둘러 길을 나선 것일까? 별별 생각을 다 하게 되더라구요.

일을 마치고 다시 돌아오는 길, 길바닥에는 여전히 놈들이 뒹굴고 있었어요. 두어 시간이 지나긴 했지만 아까 그 지렁이들일 게 뻔했어요. 아무리 용을 써봐야 속도를 내기는 어려웠을 테니까요. 발밑에는 더 많은 주검이 나뒹굴고 있었어요. 밟혀서 죽고 말라서 죽고…. 공원 길은 더없이 푸르고 아름다웠지만, 물정 모르고 꿈틀대는 놈들을 피하느라 제 발걸음은 자꾸 스텝이 꼬였죠. 저도 모르게 탄식이 새어 나왔어요.



…이 좋은 날에 너희는 무엇하러 밖에 나와 이런 꼴을 당하느냐. 그대로 땅속에 있었으면 오죽이나 좋았겠는가 말이다. 촉촉한 흙 속, 거기 가만히만 있었어도 이런 날벼락은 면했을 것이 아닌가. 너희는 거기서 먹고 싸고 뒹굴기만 해도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더없이 훌륭했다. 뭉친 흙은 부드럽게 풀어지고 토양은 더욱 비옥해졌겠지. 그 덕분에 인류는 가장 안전하고 깨끗한 최상의 거름을 얻을 수 있었고, 좋은 먹거리도 생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뿐인가. 너희는 공치사라고는 할 줄 모르는 천진한 일꾼이었다. 무심한 호미질에 댕강 몸통이 잘리기도 하고 바늘에 꿰어 낚싯밥이 된 적도 숱하게 많았건만 너희는 언제나 온유하였다. 몸을 뒤틀며 몇 번 요동을 치기는 했으나, 너희는 순순히 투항하는 자였고 세상을 이롭게 하는 자였다. 너희를 일러 ‘토룡’이라고도 하고 ‘지룡’이라고도 한 것은 결코 허명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도 너희를 보면 비명부터 지르는구나. 위대한 지신 토룡을 몰라보다니! 참으로 경박하고 배은망덕한 세상이로다. 그러니 너희는 더욱 몸을 사려야 했다. 함부로 나댈 일이 아니었다. 세상은 너희를 가만두지 않았다. 왜 그럴까? 한마디로 너희는 징그럽다는 것. 아닌 게 아니라 너희의 몸뚱이는 사뭇 달랐다. 너희는 눈도 없고 귀도 없고 손도 없고 발도 없다. 앞뒤 구분도 없이 기다랗기만 한 너희는 땅에 납작 늘어져 바닥을 기거나 방향도 없이 허우적대는 꼴이었다. 축축하고 번들거리는 피부는 만지고 싶기는커녕 행여 닿을까 무서웠다. 길 가던 사람들의 입에서 느닷없는 괴성이 터져 나올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너희는 함부로 세상을 기웃거릴 일도 아니었다. 세상은 결코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란 말이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을 진작에 새겨들었어야 했다. 너희는 꼭꼭 숨어 보이지 않게, 언제까지나 묵묵히 흙 속에 묻혀 있어야 했다. 너희가 한사코 세상으로 나온 데는 나름의 계획이 있었을 테지만 그건 너무 철모르는 짓이었다. 폭삭 으깨져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간과한 처사였다. 아무렴, 너희는 너희의 길이 있거늘….



밤중에 비가 쏟아졌어요. 천둥을 동반한 요란한 빗소리에 잠을 깼습니다. 문득 지렁이들의 안위가 걱정되었어요. 이미 죽은 놈은 관두고라도 아직 꿈틀거리는 놈들은 어떡하지? 저 굼뜬 몸뚱이로 이 날벼락을 피할 수 있을까? 내리치는 비바람에 이미 형체도 없이 휩쓸려 버린 건 아닐까? 하늘은 제 염려 따윈 아랑곳도 없을 테지만, 비바람 소리가 혹시 지렁이들의 울음은 아닌가 귀를 쫑긋하게 되더라구요. 그리고 무엇보다 저 또한 꼼짝없이 지렁이가 된 기분이었어요. 물정 모르고 세상 나대기는 저나 나나 마찬가지일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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