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을 보며-김향남 수필가
2022년 05월 23일(월) 00:45
여자는 격자 모양의 미닫이문을 배경으로 작은 책상 앞에 앉아 있다. 옅은 갈색 톤의 문살과 밝은 조명 때문인지 푸른색 원피스가 유독 짙어 보인다. 여자는 가느다란 검은 테 안경을 끼었으며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손에 들고 있는 뭔가를 읽기도 하고 말하는 중인 것도 같다. 표정은 진지하나 어딘지 부루퉁한 느낌이다. 피부는 거칠어 보이고 눈꼬리는 내려가 있고 턱밑에는 굵은 주름이 잡혀 있다. 푸른 원피스에 가려진 여자의 어깨가 조그맣게 움츠려져 있는 것도 눈에 띈다.

얼마 전 어느 모임에서 찍은(찍힌) 사진이다. 얼굴을 크게 부각한 사진이 몇 장이나 올라와 있다. 화면을 가득 채운 여자의 얼굴은 ‘나’인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다. 앞에서도 찍고 옆에서도 찍어 다양한 면면들을 포착해 놓았지만 모두 딴사람처럼 보인다. 무릇 사진만큼 정직한 것도 없다고 하지만 정직한 것이 언제나 좋은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때때로 망치가 되기도 한다.

사진은 이게 ‘팩트’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아니라고 맞서고 싶다. 심지어는 그것들을 죄다 삭제해 버리고도 싶다(이건 명백히 사진이 잘 못 나온 거야!). 공연히 그녀마저도 미워진다. 그녀는 제 임무를 한 것밖에 없지만 나는 괜스레 심통이 난다. 물론 그녀가 아니라도 벌써 누군가의 손끝에 걸려 어딘지도 알 수 없는 곳을 속수무책 떠돌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긴 하다. 어디를 가도 찍고 찍히는, 감시하고 감시당하는 세상이다. 생각할수록 무서운 일이지만 딱히 말릴 수도 없는 일임에랴.

뒤죽박죽 애꿎은 사람이나 트집 잡고 있던 나는 문득 여자의 나이를 헤아려 본다. 텔레비전이나 신문에서 봤던 것처럼 여자의 이름 뒤에 ( )를 치고 그 안에 숫자를 적어 본다. 무슨 단서라도 되듯이 이름과 숫자와 여자의 얼굴을 거푸 들여다본다. 여자와 ( )안의 숫자가 얼추 맞는 것도 같다. 인정할 수도, 인정하지 않을 수도 없는 여자의 현실이 새삼 서글프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이 절대 아니다.

내 사진첩 속에는 여자의 사진이 꽤 많이 들어 있다. 완전히는 아니어도 대개는 마음에 드는 것들이어서(그것들만 남겨 뒀으니까!) 한 장 한 장 귀하고 소중하다. 지나간 것은 언제나 애틋하고 그리운 법인가. 나는 추억의 날개를 달고 그곳으로 스며든다. 그러나 갈 수도 없고 붙잡을 수도 없는 그곳은, 그래서 환(幻)의 세계다. 환은 꿈이고 희망이며 젊음이다. 또한 상처를 어루만지는 기꺼운 손이다. 그 속에서 나는 내가 보고 싶은 여자, 내가 원하는 여자를 그려 본다. 여자는 나이 들었으되 늙지 않고, 늙었으되 추하지 않다…….

가끔 영화를 본다. 영화는 환상을 보여 준다. 이루어질 수 없는 것들이 이루어지고, 볼 수 없는 것들을 보게 해 준다. 누구도 사실이라고 믿지는 않지만, 그 가짜 환상으로 인해 현실의 삭막함이 걷힐 수도 있다. 실제보다 허구가 더 힘이 세고 현실의 사물보다 이미지가 더 오래 남는 법이니까. 그러니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은 환이고 희망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단 한 가지가 있다면 그건 환의 유혹이고 희망의 속삭임일 것이다.

다시 사진을 들여다본다. 사진은 불현듯 현실을 일깨워 준다. 이건 말할 것도 없이 객관적인 통고다. 처음 쓴 안경과 흐릿한 윤곽, 표정, 어느 것 하나 낯설지 않은 것이 없지만 그게 현실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해 준다. 그뿐인가. 삶은 갈수록 남루해지고 내게 남은 것은 결국 무(無)라는 것도 일러 주고 있다. 이제 나는 철 지난 장미원의 오후처럼 사위어 가는 햇살과 소슬한 바람, 휘감겨 오는 땅거미까지도 오직 견뎌야만 하리라. 현실은 냉혹하고 시간은 가차 없이 흘러간다. 나의 환은 매몰차게 쫓기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삼십육계 줄행랑을 친다 해도 나는 끝내 ‘잘 가라, 환’하고 쿨하게 손 흔들 수 없다. 나를 살게 하는 것은 여전히 내 안에 스며있는 환이라는 그림자다. 그림자는 언제나 나로부터 비롯되는 것. 나는 스스로를 지키고, 될 대로 되라 놔두지 않고, 마지막 남은 한 조각의 환이라도 빼앗기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 삶을 건너갈 깃털처럼 가벼운 환 하나 챙겨야 한다. 심드렁하게 누워 있는 여자를 일으켜 다시 거울 앞에 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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