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 군주 정조와 다산의 리더십-박안수 말뫼아카데미 원장·경제학박사
2022년 05월 04일(수) 02:00
오래 전에 사 두었던 ‘목민심서’를 다시 펼쳐 보았다. 6·1 지방선거가 한 달이 채 남지 않은 시점에 목민관들에게 지침이 되는 헌법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최근 광역·기초 단체장 후보들이 잇따라 확정되면서 선거 대진표가 짜이고 있다. 이들이 지역 발전을 위해 봉사를 하겠다는 의지는 칭찬받아 마땅하다. 문제는 봉사하고자 하는 마음이다. 순수한 열정인지 정치적 발판으로 삼고자 하는 정략인지 여부다.

최근 지상파TV에서 조선 22대 정조 임금을 모티브로 한 드라마가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고 종영되었다. 한 인간으로서 정조의 사랑과 통치 리더십을 그린 드라마다. 드라마는 작금의 공정과 정의, 그리고 선공후사를 은유적으로 시사했다. 조선의 태평성대이자 요순시대를 꼽는다면 아마도 세종, 영조, 정조 시대일 것이다. 흔히 이들을 대왕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모두가 알고 있듯 정조는 개혁 군주이자, 검소하고, 문무를 겸비한 군주다. 백성을 가장 아끼고 효심이 지극한 임금이라고도 이야기한다. 그는 당파와 정쟁이 가장 극렬했던 시기에 권좌에 올라 탕평책을 한층 강화하였다. 심지어 왕의 침실을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고 명명했다.

탕평 인사를 오늘날 연정이라고 보면 앞으로의 여소야대 정국에서 벤치마킹할 대목이 적지 않다. 정조는 최측근 인사가 비리에 연루되자 당시 도승지(현 비서실장)까지도 사적인 정은 뒤로 하고 읍참마속(泣斬馬謖)의 심정으로 처벌했다. 수신제가(修身齊家)의 표상인 셈이다.

정조는 선정을 펼치기 위해 규장각을 설치해 책 읽고, 공부했던 임금이다. 실학이 가장 융성했던 시절로 박제가와 이덕무 등 서얼도 관직에 등용시켰다. 역사가들은 이를 조선의 르네상스가 완성됐던 시기로 평가한다. 어디 그뿐인가 명재상인 채제공을 비롯하여, 어사 박문수, 추사 김정희 그리고 무사 백동수 등 각 분야에서 걸출한 많은 인사들이 배출되었다. 제주의 여성 사업가인 김만덕은 정조 때 전 재산을 구휼했던 의인이며, 거상 임상옥도 이때 인물이다.

정조는 다산 정약용으로 하여금 혁신도시인 화성(수원)을 건설하여 지역의 균형 발전을 시작하였고, 당시 문제가 많았던 평안도 곡산부사로 명하여 목민관으로서의 선정을 베풀도록 했다. 이는 다산이 후에 주옥 같은 마과회통과 목민심서를 집필하는 데 많은 토대가 되었을 것으로 추측해 본다.

다산은 목민심서를 비롯하여 흠흠심서, 그리고 경세유표 등 수많은 실용적인 책을 집필하였고 당시 가장 중요한 산업인 농업에 대한 시각을 편농(便農)·후농(厚農)·상농(上農)으로 체계적으로 분류해 과학적인 농사를 권장하여 농가 소득 향상에 심혈을 쏟았다. 시전 상인의 독과점인 금난전권(禁亂廛權)을 혁파하여 모든 백성이 자유롭게 장사인 상업을 할 수 있는 신해통공(辛亥通共)도 이룩하였다.

정조는 백성을 아끼는 민본사상을 바탕으로 당시 지역 차별을 없앴고 천주교인 서학까지도 받아들이는 그야말로 시대의 변화를 읽었던 개혁 군주다. 그는 오늘날 우리 모두에게 요구되는 리더십의 전형을 보여주고 실천했다. 정조 시대가 아니였으면 다산의 위대한 업적들도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역사학자들은 정조의 갑작스러운 승하가 없었다면, 조선의 운명은 더 많은 발전을 가져 왔을 것이라고 가정한다. 정조와 다산의 백성을 아끼는 목민관 리더십을 이번 지방선거에 입후보한 모든 분들이 한 번쯤 고민해 보길 기대한다.
오피니언더보기

기사 목록

광주일보 PC버전
검색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