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배경에 대하여-김향남 수필가
2022년 04월 24일(일) 23:15
결혼 후 집안일만 해오던 그녀가 재취업을 했다. 직장을 관두고도 실속 없이 배포만 큰 남자를 믿고 살기 어려웠다. 때마침 ‘나는 뭔가, 나도 내 몫의 삶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닐까?’ 내심 차오르는 욕망 또한 거역할 수 없었다. 무조건 반대만 하는 남편을 향해 이혼도 불사하겠다고 통 크게 맞선 끝에 마침내 일자리를 찾았다.

가끔 그녀의 일터에 간다. 위로받고 싶을 때, 긴장을 풀고 아무 얘기라도 주절거리고 싶을 때, 쉬고 싶을 때, 싱싱했던 그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을 때, 그럴 때면 나도 모르게 그녀가 떠오른다. 한나절씩 교대근무를 하는 그녀의 일터에서, 나는 그 시간만큼 느긋하게 휴식을 취한다. 따끈한 온찜질로 몸의 긴장을 풀고 잔뜩 뭉친 어깨에 뜸질을 한다. 다정하게 보호받는 느낌, 기분까지 나긋나긋해진다. 친구도 만나고 기운도 얻고, 오늘은 꽃구경도 하기로 했으니 이런 호사도 없겠다.

그사이 교대할 직원이 오고 그녀가 나를 소개한다.

“저랑 제일 친한 친구예요. 고등학교 1학년 때 짝꿍이었는데 만날 책 읽고 편지 쓰고 하더니 진짜 작가가 되었지 뭐예요.”

나는 공연히 겸연쩍고 쑥스럽다. 그녀의 말이 더 이어진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다 맞는다고도 할 수 없다. 글 쓴다는 명목은 얻었지만 여전히 헤매는 중이고, 늦깎이 공부를 한 것도 맞지만 갈수록 모르는 것투성이고, 아이들이라고 매양 마음을 놓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더구나 계획한 일이 완전히 수포가 되어 버린 일도 있다. 그 때문에 얼마나 낙담이 컸던가. 하지만 나는 아니라고 못 한 채 엉거주춤 서 있다.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주는 직원을 향해 나도 그냥 웃을 뿐이다. 밖으로 나오며 살짝 그녀를 꼬집는다.

“아니, 뭘 그리 꼬치꼬치….”

눈치 빠른 그녀가 얼른 내 말을 받는다.

“야야, 내가 뭐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 뭘? 그리고 내가 네 자랑하려고 그런 것 같냐?”

“……?”

의외의 대답에 다음 말이 궁금하다.

“내가 네 자랑한 것이 아니고 사실은 내 자랑이나 마찬가지야. 알고 보면 나도 괜찮은 사람이라 이거지. 날마다 핫팩이나 들고 남의 팔다리나 주무르고 있지만 그게 다가 아니라는 거지. 나도 이렇게 열심인 친구도 있고 가족도 있고 다 있다 이 말씀인 것이지. 호호호.”

그녀가 내 어깨를 치며 웃는다. 웃음 끝에 몇 마디가 더 따라온다.

“그리고 내가 살아 봐서 아는데 사람 사는 거 다 거기서 거기더라. 걱정할 거 하나도 없다니까. 야, 이렇게 만나서 수다도 떨고 꽃구경도 하고, 그럼 된 거 아니야?”

가슴속으로 뭔가 뭉클한 것이 지나간다. 농담처럼 한 말이지만 나를 위로하는 것임을 모를 리 없다. 그래, 사는 게 뭐 별건가. 이렇게 서로 알아주고 다독여 주고 함께 해 줄 수 있는 사람 있으면, 그거면 충분하지.

우리는 깔깔 웃으며 밥을 먹고, 그리고 커피를 홀짝거리며 공원을 산책한다. 구름 낀 날씨가 걸리긴 하지만 어찌 다 좋을 수만 있겠나. 이런 시간을 갖게 된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다. 하지만 흐린 날의 꽃들이 암만해도 아쉽다. 피기는 어려워도 지는 건 금방일 텐데, 내내 흐리기만 하면 어쩌나 괜한 걱정도 든다.

그러자 문득 그런 걱정일랑은 하지도 마세요, 손사래를 치는 듯 눈앞이 환해진다. 구름이 걷히면서 마구 햇살이 쏟아진다. 꽃도 나무도 금세 찬란하게 빛난다. 꽃은 더 화사하고 연초록 여린 잎은 더욱 싱그러워 보인다.

“와아, 진짜 이쁘다!”

“해가 비치니까 꽃이 훨씬 돋보이네!”

흐린 하늘에 돌연 안 보이던 것이 하나 등장했을 뿐인데 분위기는 사뭇 달라졌다. 짱짱한 뒷배를 모셔온 듯 꽃들도 야무지게 제 빛을 피워 낸다. 꽃을 꽃이게 하고 봄을 봄이게 하는 진짜 봄날이다.

생각해 보면 아무리 예쁜 꽃이라도 홀로 빛나지는 않은 것 같다. 태양이 있어 그 빛을 비추어야 하고 바람이 불어 그 향기를 일으켜야 한다. 벌과 나비도 있어야 하고, 그리고 지나가는 과객도 몇쯤은 있어야 하리라.

당신도 나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기꺼이 서로의 배경이 되어줄 때, 그래서 삶의 온기를 나누어 가질 때, 그때가 가장 행복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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