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전이 벽해 되어도 비켜설 곳이 있다-황옥주 수필가
2022년 04월 18일(월) 23:00 가가
코로나19의 기세가 꺾일 줄 모르고 등등하다. 방역도 백신도 극값에 이르지 않나 싶다. 조선시대에는 무서운 호랑이도 착호갑사(捉虎甲士)를 양성하여 잡았다는데 코로나를 잡을 갑사는 없는 것인가? 밤샘을 같이하며 환자들을 보살피는 의료진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자고나면 “날 잡아 봐라”다.
어디다 맘을 맡길 곳이 없다. 본마음은 아닌데, 의초롭게 지냈던 친구들마저 소원해져 간다는 느낌이다. 서로가 조심스러워 부르지도 못하고 불러 주지도 않는다. 인내의 열매가 값진들 억지 단절과 고립은 수행승의 고행과는 다르다.
친좁은 사이에 전화마저 뜸해지고 대화 알맹이도 공허하다. “어떻게 지내나?” 묻고 나면 뒷말이 궁하다. “자네는?” 돌아온 답도 싱겁다. 늙어가는 마당에 신명난 이야기도 시원찮은데 맥 빠진 푸념뿐이다. 춘추시대는 제사 지내다 세월 보내고, 전국시대는 싸움질로 세월 보낸다더니 이 시대는 코로나 얘기로 세월이 흘러간다.
언제부턴가 광주 지역만 해도 확진자 수가 만 명을 넘었었다. 물경 다섯 자리 숫자다. 한 자리 숫자에도 떨었던 것을 생각하면 상상이 안 되는 공포였다. 요즈음은 네 자리에서 머문 듯싶어 그나마 다행이라 할지 모르겠으나 다섯 자리 숫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 불안키는 마찬가지다.
봄이라고 아파트 뜰에 벚꽃이 한창이다. 꽃들이 웃을 때 같이 웃고 싶은 기분이 아니다. 친구들은 어떨까? 그들의 삶인들 별반 다를 것 같지가 않다. 친구의 생활이 내 생활이고, 내 일상이 친구의 일상일 터다.
며늘애가 휴대폰으로 보내준 스타박스 쿠폰 차를 같이 마셔줄 사람이 없어 단 한 차례 혼자서 마셨을 뿐인데 3개월의 유효 기간이 지나 버렸다. 고마운 정이야 남아있지만 돈은 가치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래저래 노인의 삶은 잘 마른 불쏘시개처럼 푸석푸석하다.
코로나 심술이 벌써 삼 년째다. 너무 오랫동안 일상이 뒤틀려 삐걱댄다. 국가도 우왕좌왕이다. K-방역을 자랑으로 내세우던 때는 언제고 구급차 안에서 출산하는 산모가 생겨나고 어쩌다가 환자가 응급실 바닥에서 투석을 해야 하는 처지에 이르렀는지 서글프다. 중증 확진 어린애가 이송 중 숨졌다는 소식도 우리나라 얘기다. 위급한 한 살배기가 병원에 격리실이 없다고 거절당했다면 누구의 책임일까?
며칠 전에는 확진자 세계 1위라는 불명예스러운 기사가 나왔다. 가까운 아시아 주요국들과만 비교해도 압도적 1위란다. ‘압도적’이라는 단어가 부정적으로 쓰일 양이면 두려운 일이다. 일본의 네 배가 넘고, 후진국 취급받은 인도의 일곱 배, 방역 모범국인 대만에 비하면 물경 231배나 된다니 진짜로 압도적이다. 물론 국가가 손 놓고 있는 것은 아닌데 국민의 불평 소리가 높으면 답답할 것이다. 그렇다고 ‘방역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있다’는 국무총리의 말이 무색하다. 국민의 희생을 주요국의 10분의 1 이하로 최소화했다는 설명에는 그야말로 기가 찰 일이다.
어려움이 이어지다 보면 ‘정점’이나 ‘고비’란 말만 들어도 반갑다. 뭔가 괜찮을 것 같은 희망이 희붐하게 다가서는 것 같아서다. 그 예측이 빗나갈 때는, 더구나 몇 번이나 헛바퀴 돌고 나면 더 허무하다. 늑대와 양치기 소년의 얘기가 얼핏 설핏 스쳐간다. 힘없는 서민들은 국가만 바라보고 산다는 걸 기억해주면 좋겠다.
인간의 무기력은 중병이다. 방구석에 박힌 도피가 코로나를 이기는 바른 해법은 아니리라. 백신이면 다 해결된다는 낭보가 퍼질 날을 기다려 본다. 기다림이 희망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희망은 “잠자고 있지 않는 인간의 꿈”이다. 희망이 필요 없다면 절망은 더더구나 필요 없다. 희망은 빛이다. 시인이 아무리 석양빛이 아름답다 노래해도 아침 빛살만큼은 못하다.
희망의 색은 녹색이다. 하루가 다르게 산천이 푸르러져 가고 있다. ‘상전이 벽해 되어도 비켜설 곳이 있다’는 속담을 가슴에 안고 희망 속에 살아 볼 일이다. 머지않은 내일에 웃음소리가 창문을 넘을 날이 오리니. 그런데 가뜩이나 ‘전염력 더 세진 XE 변이’가 무슨 변통을 일으키려는지 미리부터 머리가 어지럽다.
친좁은 사이에 전화마저 뜸해지고 대화 알맹이도 공허하다. “어떻게 지내나?” 묻고 나면 뒷말이 궁하다. “자네는?” 돌아온 답도 싱겁다. 늙어가는 마당에 신명난 이야기도 시원찮은데 맥 빠진 푸념뿐이다. 춘추시대는 제사 지내다 세월 보내고, 전국시대는 싸움질로 세월 보낸다더니 이 시대는 코로나 얘기로 세월이 흘러간다.
며늘애가 휴대폰으로 보내준 스타박스 쿠폰 차를 같이 마셔줄 사람이 없어 단 한 차례 혼자서 마셨을 뿐인데 3개월의 유효 기간이 지나 버렸다. 고마운 정이야 남아있지만 돈은 가치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래저래 노인의 삶은 잘 마른 불쏘시개처럼 푸석푸석하다.
코로나 심술이 벌써 삼 년째다. 너무 오랫동안 일상이 뒤틀려 삐걱댄다. 국가도 우왕좌왕이다. K-방역을 자랑으로 내세우던 때는 언제고 구급차 안에서 출산하는 산모가 생겨나고 어쩌다가 환자가 응급실 바닥에서 투석을 해야 하는 처지에 이르렀는지 서글프다. 중증 확진 어린애가 이송 중 숨졌다는 소식도 우리나라 얘기다. 위급한 한 살배기가 병원에 격리실이 없다고 거절당했다면 누구의 책임일까?
며칠 전에는 확진자 세계 1위라는 불명예스러운 기사가 나왔다. 가까운 아시아 주요국들과만 비교해도 압도적 1위란다. ‘압도적’이라는 단어가 부정적으로 쓰일 양이면 두려운 일이다. 일본의 네 배가 넘고, 후진국 취급받은 인도의 일곱 배, 방역 모범국인 대만에 비하면 물경 231배나 된다니 진짜로 압도적이다. 물론 국가가 손 놓고 있는 것은 아닌데 국민의 불평 소리가 높으면 답답할 것이다. 그렇다고 ‘방역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있다’는 국무총리의 말이 무색하다. 국민의 희생을 주요국의 10분의 1 이하로 최소화했다는 설명에는 그야말로 기가 찰 일이다.
어려움이 이어지다 보면 ‘정점’이나 ‘고비’란 말만 들어도 반갑다. 뭔가 괜찮을 것 같은 희망이 희붐하게 다가서는 것 같아서다. 그 예측이 빗나갈 때는, 더구나 몇 번이나 헛바퀴 돌고 나면 더 허무하다. 늑대와 양치기 소년의 얘기가 얼핏 설핏 스쳐간다. 힘없는 서민들은 국가만 바라보고 산다는 걸 기억해주면 좋겠다.
인간의 무기력은 중병이다. 방구석에 박힌 도피가 코로나를 이기는 바른 해법은 아니리라. 백신이면 다 해결된다는 낭보가 퍼질 날을 기다려 본다. 기다림이 희망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희망은 “잠자고 있지 않는 인간의 꿈”이다. 희망이 필요 없다면 절망은 더더구나 필요 없다. 희망은 빛이다. 시인이 아무리 석양빛이 아름답다 노래해도 아침 빛살만큼은 못하다.
희망의 색은 녹색이다. 하루가 다르게 산천이 푸르러져 가고 있다. ‘상전이 벽해 되어도 비켜설 곳이 있다’는 속담을 가슴에 안고 희망 속에 살아 볼 일이다. 머지않은 내일에 웃음소리가 창문을 넘을 날이 오리니. 그런데 가뜩이나 ‘전염력 더 세진 XE 변이’가 무슨 변통을 일으키려는지 미리부터 머리가 어지럽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