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별(★)을 훔치다-김향남 수필가
2022년 04월 10일(일) 23:55
가끔, 나는 도둑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도둑질을 하지 않고 무구하게 살아온 것은 고작 예닐곱 살까지가 전부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줄곧 누군가의 무엇을 훔치곤 했다. 처음엔 연필을, 그다음엔 지우개를, 그다음엔 동전 하나를 슬쩍했다. 어느 날 고추밭 속의 가지를 훔친 적도 있었다. 크고 통통한, 늘씬하게 쭉 뻗은 고놈은 햇빛을 받아 더욱 윤택해 보였다.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저녁때 선주네 할머니가 우리 집에 왔다. 대번에 내 심장이 쿵쾅거렸다. 엄마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보나 마나 뻔한 일이었다. 한동안 나는 집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보는 사람마다 쯧쯧 손가락질을 할 것만 같았다.

중학생 때였다. 어버이날을 맞아 글짓기 숙제가 주어졌다. 뭘 써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딱히 효도해 본 기억도 없고 감사하는 마음이 샘솟는 것도 아니어서, 쓰자니 한 줄도 잇기 어려웠다. 마침 언니가 보던 시집이 있었다. 그 책을 이리저리 뒤적이며 맘에 든 구절들을 골라냈다. 한 군데만 뭉텅 가져오면 들킬지도 모르니까 여기저기에서 표 안 나게 살짝 끄집어냈다. 그다음엔 그것들을 적절히 배열하고 엮어 내는 일을 했다. 낱말과 낱말, 문장과 문장 사이를 오가며 드디어 글 한 편을 꿰어 냈다. 그리고는 하얀 원고지에 정성껏 다시 썼다.

다음다음 날, 국어 선생님이 나를 찾으셨다. 손에는 원고지가 들려 있었다. 아뿔싸, 들키고 말았구나. ‘도둑이 제 발 저린다’더니 내가 딱 그 짝이었다.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이거 네가 쓴 거 맞아?”

원고지를 높이 들고 선생님이 날 겨냥했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짜아식, 이런 재주도 있었어? 최고상이야.”

조마조마 숨죽이고 있던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보고 있던 아이들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고 손뼉을 쳤다. 나는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선생님은 내 머리를 쓰다듬기까지 했다.

“내일 아침 운동장에서 조회할 때 단상에 올라가서 이 글을 읽어야 해. 원고를 줄 테니까 집에 가서 연습해 오도록. 알겠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내가 글을 훔쳐 썼다는 것을 전교생 앞에 포고하라니. 그것도 내 입으로 직접! 내 얼굴은 숫제 백지장이 되고 말았다. 혹시 선생님께서 눈치채고 날 벌주려고 그런 건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야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노벨문학상이 꿈이라던, 글짓기만 하면 상이란 상은 죄다 제 것이었던 경미는 어디 가고…. 뭔가 잘못된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제라도 이실직고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래, 깨끗하게 양심선언하고 다시는 훔치는 일 따위로 가슴 졸이지 말자.

일은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나는 걸핏하면 글짓기에 동원되었다. 현충일, 광복절, 국군의 날, 한글날 등등 무슨 날이 그렇게도 많은지, 그때마다 공공연히 애국심에 불타야 하는 일이라니…. 그런 일을 모두 나에게 떠넘기는 친구들도 선생님도 원망스럽기만 했다. 그렇게 하려고 선생님은 내 죄를 눈감아 준 것이 아니었을까? 남의 것을 훔친 죄가 그토록 나를 옥죌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러나 훔치는 실력만큼은 더욱 늘었다. 책을 읽다가 괜찮은 구절이다 싶으면 밑줄을 그었고 더러 베껴 두기도 했다. 감동해서 그런 것이라고, 그것을 잊지 않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나중에 쓰일 것을 염두에 두었음은 물론이다. 지금이라고 다를까. 여전히 훔치기 위해 글을 읽고 내 것인 양 표 안 나게 눙치려고 부지런히 엿본다. 가끔 흉내 내어 글을 써 보기도 한다. 누군가 써 놓은 글귀를 당겨 내어 내 이야기를 푸는 실마리로 삼기도 한다. 해 보니 재미도 있고 가끔은 뿌듯함이 밀려올 때도 있다.

이제 나는 연필이나 가지 따위는 관심도 없다. 그걸 훔치느니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겠다. 도깨비감투가 있는 것도 아닌데 그따위 빤한 물건을 훔쳐 망신살 일이 뭐 있겠나. 나는 이제 보이는 것을 선택하지 않는다. 보여도 안 보이는 것을 포획한다. 이를테면 밤하늘의 별 같은 혹은 당신 가슴 속의 심장 같은 것 말이다. 그것들을 향하여 그물을 치고, 서서히, 야금야금, 확 먹어 치울 방법은 없을까? 열심히 궁리해 보는 중이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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