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화백에게 영감을 준 김광섭의 ‘저녁에’-박종섭 전 백제여상 교장
2022년 03월 29일(화) 01:00 가가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 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김광섭 ‘저녁에’ 전문)
이 시는 별을 매개로 나와 마주 보는 별은 나와의 만남을 통해 가까운 존재가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서로를 발견한 뒤 마주 보고 있다는 것은 나와의 만남이 특별한 인연이므로 우리들은 인식의 대상으로서 누군가에게 잊혀 지지 않는 하나의 꽃이 되고 싶다는 것이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 중에 누군가를 그리워한다면, 너는 나에게 특별한 존재이다. 따라서 지금 나를 바라보는 별은 나를 가장 소중한 존재의 대상으로 여긴다. 이처럼 이 시는 불교적 윤회를 배경으로 별과 헤어지는 아쉬움 속에 다시 만나기를 바라는 거자필반(去者必返)을 노래하고 있다.
‘저녁에’의 시간적 배경은 별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인생의 황혼기나 임종을 앞둔 짧은 만남처럼 운명의 헤어짐에서 오는 고독과 성찰의 시간이다. 이산(怡山) 김광섭 시인은 반짝이는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뉴욕에서 한국의 아름다움과 서구의 논리성을 결합해 민족의 정체성을 추상의 예술혼으로 승화시키는 8년 후배 수화(樹話) 김환기 화백의 얼굴을 떠올린다. 얼마나 그립고 두터운 우정이었으면 이처럼 아름다운 시어들이 별처럼 돋아났을까? 이산은 이를 형상화한 ‘저녁에’를 ‘월간중앙’ 제20호(1969년, 11월 호)에 발표한 뒤 수화에게 보낸다.
수화는 1969년 12월 이산이 보내온 ‘저녁에’를 보고 창작의 모티프를 얻어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그림으로 화답하였다. 1970년 2월 57세의 수화는 한국일보 주관 ‘한국미술대상’ 공모전 소식을 듣고 당혹스러움에 잠시 고민한다. 그러다 국내 화가들에게 미술 세계는 광대하다는 것을 깨우쳐 주고 침체된 화단에 역동성을 불어넣고자 ‘저녁에’에서 영감을 받은 그림을 출품해 한국미술대상을 받는다.
저녁이면 검푸른 색이 도는 안좌도의 고향 바다와 어스름이 내리면 검푸른 색으로 변하는 뉴욕의 밤하늘, 그 위에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 기쁨 등을 추억하며 검푸른 점을 찍는다. 선·점·십자 구도 등으로 추상 속의 구상, 구상 속의 추상, 반추상 등으로 문화가 다른 미국인들도 공감할 수 있는 그림에 전념한다. 유년 시절 고향 안좌도의 바닷가에 밀물 같은 그리움이 차오르면 붓을 사뿐히 눌러 찍어 옆으로 번지는 눈물이 된 얼굴은 화가·수필가·비평가로 활동한 9년 선배 근원(近園) 김용준을 회상하게 한다.
근원은 해방 후 수화와 함께 서울대 미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회화에서 일본 색채를 제거하고 민족 예술의 정체성을 표현한 수묵채색화의 초석을 놓았다. 그러던 중 미군정의 식민지 교육정책에 항의하는 수단으로 교수직을 사퇴한 뒤 성북동의 집 노시산방(老枾山房)을 수화에게 넘겨 준다. 이후 한국전쟁 중 월북해 평양미술대학 교수로 북한의 미술 기반을 다지는데 기여한다.
수화는 인식과 공감으로 친화력이 두터웠던 근원이 월북한 후 정신적 공허감의 빈자리를 이산과의 만남으로 대신하였다. 이산은 일본 유학 후 중동학교 재직 시절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여 반일 감정을 부추겼다는 이유로 3년 8개월을 감옥에서 지냈다. 1961년 성북동에서 이웃사촌이 된 수화와 교감을 나누게 된다. ‘저녁에’는 급격한 산업화로 인한 환경 파괴는 인간성 상실로 전이된다는 경고를 담은 ‘성북동 비둘기’와 함께 고교 교과서에 수록되어 국민의 시가 되었다. 가수 유심초에 의해 가요로 불려지면서 크게 대중화됐다.
저녁이면 검푸른 색이 도는 안좌도의 고향 바다와 어스름이 내리면 검푸른 색으로 변하는 뉴욕의 밤하늘, 그 위에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 기쁨 등을 추억하며 검푸른 점을 찍는다. 선·점·십자 구도 등으로 추상 속의 구상, 구상 속의 추상, 반추상 등으로 문화가 다른 미국인들도 공감할 수 있는 그림에 전념한다. 유년 시절 고향 안좌도의 바닷가에 밀물 같은 그리움이 차오르면 붓을 사뿐히 눌러 찍어 옆으로 번지는 눈물이 된 얼굴은 화가·수필가·비평가로 활동한 9년 선배 근원(近園) 김용준을 회상하게 한다.
근원은 해방 후 수화와 함께 서울대 미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회화에서 일본 색채를 제거하고 민족 예술의 정체성을 표현한 수묵채색화의 초석을 놓았다. 그러던 중 미군정의 식민지 교육정책에 항의하는 수단으로 교수직을 사퇴한 뒤 성북동의 집 노시산방(老枾山房)을 수화에게 넘겨 준다. 이후 한국전쟁 중 월북해 평양미술대학 교수로 북한의 미술 기반을 다지는데 기여한다.
수화는 인식과 공감으로 친화력이 두터웠던 근원이 월북한 후 정신적 공허감의 빈자리를 이산과의 만남으로 대신하였다. 이산은 일본 유학 후 중동학교 재직 시절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여 반일 감정을 부추겼다는 이유로 3년 8개월을 감옥에서 지냈다. 1961년 성북동에서 이웃사촌이 된 수화와 교감을 나누게 된다. ‘저녁에’는 급격한 산업화로 인한 환경 파괴는 인간성 상실로 전이된다는 경고를 담은 ‘성북동 비둘기’와 함께 고교 교과서에 수록되어 국민의 시가 되었다. 가수 유심초에 의해 가요로 불려지면서 크게 대중화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