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봄볕은 따스하고 - 김향남 수필가
2022년 03월 28일(월) 07:00 가가
그녀는 저수지 언덕배기에서 쑥을 캐고 있었다. 언제 불을 놓았는지 언덕은 검은 재로 뒤덮여 있었지만, 소보록하게 돋은 쑥들은 파릇하고 정갈했다. 노다지라도 만난 듯 흐뭇해진 그녀는 바지에 검댕이가 묻건 말건, 몸이 기우뚱 기울어지건 말건 온통 쑥 캐는 데만 정신이 팔렸다. 향긋하고 맑은 쑥들이 눈앞에 수북한데 딴생각이 날 리도 없었다. 검은 봉지에 쏙쏙 노다지를 캐 담느라 아주 그냥 신이 났다.
그녀의 등 뒤로 다사로이 햇볕이 내렸다. 웬일인지 바람은 기척도 안 했다. 건너편 산자락에선 구구구구 산비둘기가 울었다. 기슭에 홀로 선 버드나무엔 늘어진 가지마다 철철 연둣빛이 흘렀다. 나무는 동산처럼 부푼 몸을 물속에 비추었다. 물속에는 고스란히 또 한 세상이 열렸다. 깊고 그윽하고 여유롭고 화사한, 구름도 떠가고 이따금 새가 날기도 하는 아리따운 세상. 수면 위에는 간간이 물살이 일고, 푸드덕 물고기가 뛰어오르기도 했다.
풍경에 취한 듯 그녀는 잠시 가만히 있었다. 아까는 보이지 않던 큰 나무도 보이고, 우듬지에 걸린 새집도 보이고, 언제 왔는지 물가에 앉아 있는 한 노인도 보였다.
그녀는 성큼 일어나 물가로 내려갔다. 노인은 물속에 쳐놓은 통발을 살피는 중이었다. 옆에 놓인 노란 양동이 안에는 물고기도 몇 마리 들어가 있었다. “오, 고기가 좀 잡혔네요?” 대뜸 건넨 인사였지만 노인 역시 흔연스러웠다. “쑥 캐러 오겠소? 여그 쑥이 참 깨끗허고 좋아라우.” 그녀는 노인 옆에 바투 앉아 이것저것 더 물었다. “요래 넣어두고 메칠 있다 보믄 몇 마리씩은 잽히요.” 노인의 어업(?)은 참으로 순박해 보였다. 물속에 통발을 넣어두고 스스로 들어오기만을 기다리는 것이라니…. “이따가 우리 딸하고 사우가 온다는 디 매운탕이나 끓여 줘야 쓰겄소.” 노인은 만족한 듯 웃었다.
그녀는 다시 쑥을 캐기 시작했다. 몇 마디 오간 끝이 따스하고 훈훈했다. 어쩐지 여기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배롱나무꽃 흐드러진 여름날을 제외하면 사람 발길이 뜸한 곳이었다. 간간이 벌거벗은 배롱나무나 정자 주변을 서성이다 가는 사람도 없지는 않지만 아래쪽 저수지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오래 다녀 본 사람이나 알 수 있는 한갓진 곳이었다. 그녀는 또 그것이 좋았다. 봄빛 물씬한 물가 둔덕이 온통 그녀 차지였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어디선지 도란도란 주고받는 소리가 들려왔다. 까르르 웃는 소리도 들렸다. 격의 없는 웃음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예의 그 노인 곁에 한 여자가 다가와 있었다. 여자의 목소리가 유난히 낭랑했다. 그녀는 자꾸만 그쪽으로 귀가 쏠렸다. 잘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말끝마다 따라붙는 ‘엄마’라는 호칭만은 또렷이 들렸다. 그녀는 자기보다 훨씬 나이 들어 보이는 여자가 아직도 ‘엄마 엄마’ 하는 것에 알 수 없는 질투를 느꼈다.
‘엄마’를 불러본 지가 언제였더라? 아득하고 아련한, 서늘하고 촉촉한 무엇이 휑하니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아휴, 우리 엄마는 왜 그렇게 빨리 돌아가셨을까. 아니지, 뭐 하려고 다 늙어서 나를 낳았을까. 그녀는 당신 고생한 것은 생각지도 않고 맨 꼴찌로 태어난 것만이 억울해 죽겠다는 듯 연신 투덜거렸다.
기억 속의 엄마는 언제나 늙어 있었다. 학교에라도 오는 날은 더욱 그랬다. 그때마다 그녀는 몹시도 당혹스러웠다. 선뜻 나아갈 수도 물러날 수도 없는 애매한 상황. 쭈뼛대던 마음자리를 모를 리도 없으련만, 멀리서도 바로 그녀를 찾아내고 화들짝 반기곤 하였다. 차마 외면하진 못했지만 주춤거렸던 그 순간을 그녀는 잊지 못했다. 그 생각이 떠오르자 얼굴이 홧홧거렸다. 줄줄이 일어나는 회한을 막을 수도 없었다.
모녀의 대화는 끊이지 않았다. 무슨 할 얘기가 저리도 많을까. 웃음소리 역시 그치지 않았다. 저토록 듣기 좋은 웃음이라니. 그녀는 그녀들을 바라봤다. 꿈을 꾸듯 아련히 그녀들을 건너다보았다. 자그맣고 바지런한 노인이 마치 제 엄마라도 되듯이, 바짝 다가앉은 여자가 꼭 자신이라도 되는 듯이….
그녀는 노인의 짧은 파마머리와 빨갛고 파란 조끼, 꽃무늬 바지와 검정색 고무장화, 그리고 도란거리는 말소리를 오랫동안 바라보며 듣고 있었다. 봄볕은 따스하고 이따금 산비둘기가 울었다.
그녀는 다시 쑥을 캐기 시작했다. 몇 마디 오간 끝이 따스하고 훈훈했다. 어쩐지 여기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배롱나무꽃 흐드러진 여름날을 제외하면 사람 발길이 뜸한 곳이었다. 간간이 벌거벗은 배롱나무나 정자 주변을 서성이다 가는 사람도 없지는 않지만 아래쪽 저수지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오래 다녀 본 사람이나 알 수 있는 한갓진 곳이었다. 그녀는 또 그것이 좋았다. 봄빛 물씬한 물가 둔덕이 온통 그녀 차지였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어디선지 도란도란 주고받는 소리가 들려왔다. 까르르 웃는 소리도 들렸다. 격의 없는 웃음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예의 그 노인 곁에 한 여자가 다가와 있었다. 여자의 목소리가 유난히 낭랑했다. 그녀는 자꾸만 그쪽으로 귀가 쏠렸다. 잘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말끝마다 따라붙는 ‘엄마’라는 호칭만은 또렷이 들렸다. 그녀는 자기보다 훨씬 나이 들어 보이는 여자가 아직도 ‘엄마 엄마’ 하는 것에 알 수 없는 질투를 느꼈다.
‘엄마’를 불러본 지가 언제였더라? 아득하고 아련한, 서늘하고 촉촉한 무엇이 휑하니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아휴, 우리 엄마는 왜 그렇게 빨리 돌아가셨을까. 아니지, 뭐 하려고 다 늙어서 나를 낳았을까. 그녀는 당신 고생한 것은 생각지도 않고 맨 꼴찌로 태어난 것만이 억울해 죽겠다는 듯 연신 투덜거렸다.
기억 속의 엄마는 언제나 늙어 있었다. 학교에라도 오는 날은 더욱 그랬다. 그때마다 그녀는 몹시도 당혹스러웠다. 선뜻 나아갈 수도 물러날 수도 없는 애매한 상황. 쭈뼛대던 마음자리를 모를 리도 없으련만, 멀리서도 바로 그녀를 찾아내고 화들짝 반기곤 하였다. 차마 외면하진 못했지만 주춤거렸던 그 순간을 그녀는 잊지 못했다. 그 생각이 떠오르자 얼굴이 홧홧거렸다. 줄줄이 일어나는 회한을 막을 수도 없었다.
모녀의 대화는 끊이지 않았다. 무슨 할 얘기가 저리도 많을까. 웃음소리 역시 그치지 않았다. 저토록 듣기 좋은 웃음이라니. 그녀는 그녀들을 바라봤다. 꿈을 꾸듯 아련히 그녀들을 건너다보았다. 자그맣고 바지런한 노인이 마치 제 엄마라도 되듯이, 바짝 다가앉은 여자가 꼭 자신이라도 되는 듯이….
그녀는 노인의 짧은 파마머리와 빨갛고 파란 조끼, 꽃무늬 바지와 검정색 고무장화, 그리고 도란거리는 말소리를 오랫동안 바라보며 듣고 있었다. 봄볕은 따스하고 이따금 산비둘기가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