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배의 가치-박용수 광주동신고 교사·수필가
2022년 03월 20일(일) 23:10 가가
수험표를 받은 녀석 표정이 당당하다. 여태 1등만 하였으니 두려움이 없어 보인다. 자신만만하다. 멀어져 가는 녀석의 등을 바라보며, 얼마 전 병원에서 마주한 불친절하고 오만방자한 의사가 떠올랐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나를 의심했다. 앞에서는 최선을 다하라고 했으면서도 속으로는 제발 낙방하라고 싹싹 빌고 있지 않는가. 그것도 낙동강 오리알처럼 폭삭 망하라고 말이다. 이런 고약한 심보가 어디 있는가. 모름지기 응원해도 부족할 터인데 험담에 악담이라니.
나도 한때 저 녀석처럼 두려움이 없던 때가 있었다. 공부도 쏙쏙 잘 되었고, 운동도 그랬다. 기고만장했다. 시와 소설, 그리고 평론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고 썼다. 까짓 하나는 걸리겠지 오만할 때였다. 그리고 신년이면 찾아온 열병은 쓰라린 패배를 남기고 아지랑이처럼 갔다. 그때마다 식음을 전폐하기도 했고, 또 며칠은 취해서 눕기도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비참함을 견딜 수 없었다. 그렇게 수없이 낙방하고서야 가랑비 젖듯 패배에 익숙해졌다.
돌아보건대 그 뒤, 내 삶의 9할은 패배였던 것 같다. 도무지 되는 것이 없었다. 하는 족족 실패였다. 패배가 잡초라면 승리는 무성한 잡초 밭에 듬성듬성 핀 꽃 정도였다. 그러니 1할의 성공으로 살아간 것이 아니고 그 9할이 내 삶을 밀고 끌고 왔던 것 같다. 무슨 일을 할 때마다 패배는 내 등딱지에서 불쑥 나타나 호시탐탐 앞길을 가로막았다.
기쁜 소식이 들려왔다. 녀석이 낙방했다고 한다. 더 좋은 소식도 연달아 들어왔다. 녀석은 방문을 걸어 잠그고 식음을 전폐하고 있단다. 난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상심이 클 것이다. 나는 녀석이 합격하면 어쩌지 되레 걱정을 했다. 이쯤해서 한 번쯤 쉬었다 가기를 바랐다.
패배를 만나면 싫든 좋든 함께 살아야 한다. 패배는 눈물만 주는 것이 아니라 경솔하지 않고, 겸손하게 타인을 이해하고 허용하게 해준다. 패배가 주는 선물이다. 그만큼 사유의 세계가 넓어지고 생각이 확장된 것이다. 성공했을 때 얻을 수 없는 훨씬 더 소중한 지혜와 가치를 깨닫는다.
패배한 날은 누구나 늦게까지 잠 못 이룬다. 끙끙 앓으면서 자기 생각과 행동을 복기한다. 그 패배는 쓰라릴수록 좋고 어디 몸 한구석이 쑤셔 와 한 이삼일 앓아누울 정도면 더욱 좋다. 그래서 진정, 머리로 세상을 살기보다 가슴으로 세상을 껴안도록 한다. 승리의 기쁨은 얼굴에 나타난다면 패배는 그 아래로 쭉 내려와 가슴 깊은 곳의 통점을 건드린다.
그러면서 조금씩 동어반복의 문장과 비문이 보였다. 그리고 엉성한 구성과 팽팽하지 못한 줄거리, 진부한 사유가 속속 얼굴을 드러냈다. 난 낙선이 주는 고통을 먹고 한 단계 뛰어오를 수 일었다.
인생 최대의 실패는 노력을 중지하는 것이라고 루스벨트 대통령이 말했듯이 썩지 않으면 언제고 싹이 튼다. 칠전팔기는 시작도 아니다. 사는 일은 죽는 날까지 도전하는 일이다. 거듭 실패해도 도전할 힘이나 오기가 있다면 괜찮은 인생이다. 아홉 번 실패했다는 것은 아홉 번 도전했다는 말이다. 우리가 회피할 뿐이지, 실패는 성공보다 훨씬 가까이에서 더 많은 교훈을 준다.
썩 괜찮은 패배라고 격려해 주었다. 네가 좋아하는 네 아버지도 그리고 할아버지도, 또 이순신 장군도 그랬다고 했다. 열 손가락을 잃고서 비로소 8000미터 고산 도전을 시작한 한 등산가 이야기도 꺼냈다. 불가능이란 말을 그때부터 가능으로 바꾸었단다. 눈썹 하나라도 뽑고 가야 하는 도전, 난 그는 패배하지 않았다고 했다. 봄이면 빙벽을 뚫고 우리 곁으로 성큼 다가올 것으로 여긴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패배한다. 아니 매일 패배한다. 그러면서 매일 일어서고 또 내일을 꿈꾼다. 진정한 승자들은 그 수많은 패배에서 물줄기를 되돌려 승리를 만들어 간다. 사랑도 그렇다. 그냥 이루어지는 사랑은 없다. 사랑도 패배를 통해서 단단해진다.
우린 어찌 보면 완전한 실패나 영원한 승리가 없는 세계에서 살고 있다. 그냥 패배와 성공 사이를 오갈 뿐이다. 세상은 실상 승패를 가르는 곳도 아니다. 좀 앞서가거나 뒤쳐졌을 뿐, 당신 의지에 따라 언제고 앞뒤가 바뀔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생이 멋진 것이다.
패배를 만나면 싫든 좋든 함께 살아야 한다. 패배는 눈물만 주는 것이 아니라 경솔하지 않고, 겸손하게 타인을 이해하고 허용하게 해준다. 패배가 주는 선물이다. 그만큼 사유의 세계가 넓어지고 생각이 확장된 것이다. 성공했을 때 얻을 수 없는 훨씬 더 소중한 지혜와 가치를 깨닫는다.
패배한 날은 누구나 늦게까지 잠 못 이룬다. 끙끙 앓으면서 자기 생각과 행동을 복기한다. 그 패배는 쓰라릴수록 좋고 어디 몸 한구석이 쑤셔 와 한 이삼일 앓아누울 정도면 더욱 좋다. 그래서 진정, 머리로 세상을 살기보다 가슴으로 세상을 껴안도록 한다. 승리의 기쁨은 얼굴에 나타난다면 패배는 그 아래로 쭉 내려와 가슴 깊은 곳의 통점을 건드린다.
그러면서 조금씩 동어반복의 문장과 비문이 보였다. 그리고 엉성한 구성과 팽팽하지 못한 줄거리, 진부한 사유가 속속 얼굴을 드러냈다. 난 낙선이 주는 고통을 먹고 한 단계 뛰어오를 수 일었다.
인생 최대의 실패는 노력을 중지하는 것이라고 루스벨트 대통령이 말했듯이 썩지 않으면 언제고 싹이 튼다. 칠전팔기는 시작도 아니다. 사는 일은 죽는 날까지 도전하는 일이다. 거듭 실패해도 도전할 힘이나 오기가 있다면 괜찮은 인생이다. 아홉 번 실패했다는 것은 아홉 번 도전했다는 말이다. 우리가 회피할 뿐이지, 실패는 성공보다 훨씬 가까이에서 더 많은 교훈을 준다.
썩 괜찮은 패배라고 격려해 주었다. 네가 좋아하는 네 아버지도 그리고 할아버지도, 또 이순신 장군도 그랬다고 했다. 열 손가락을 잃고서 비로소 8000미터 고산 도전을 시작한 한 등산가 이야기도 꺼냈다. 불가능이란 말을 그때부터 가능으로 바꾸었단다. 눈썹 하나라도 뽑고 가야 하는 도전, 난 그는 패배하지 않았다고 했다. 봄이면 빙벽을 뚫고 우리 곁으로 성큼 다가올 것으로 여긴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패배한다. 아니 매일 패배한다. 그러면서 매일 일어서고 또 내일을 꿈꾼다. 진정한 승자들은 그 수많은 패배에서 물줄기를 되돌려 승리를 만들어 간다. 사랑도 그렇다. 그냥 이루어지는 사랑은 없다. 사랑도 패배를 통해서 단단해진다.
우린 어찌 보면 완전한 실패나 영원한 승리가 없는 세계에서 살고 있다. 그냥 패배와 성공 사이를 오갈 뿐이다. 세상은 실상 승패를 가르는 곳도 아니다. 좀 앞서가거나 뒤쳐졌을 뿐, 당신 의지에 따라 언제고 앞뒤가 바뀔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생이 멋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