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위에서-김향남 수필가·조선대학교 외래교수
2022년 03월 14일(월) 04:00 가가
어스름 새벽녘에 집을 나선다. 목적지는 지리산 노고단, 내 단골 산행 코스다. 중간(성삼재)까지는 차로 갈 수 있으니 드라이브하기에도 좋고 거리도 그리 멀지 않은 편이라 하루쯤 보내기로 그만한 곳도 없다. 해발 1500m가 넘지만 잘 닦인 길을 따라 한 시간 남짓 오르면 하늘정원이라 불리는 산등성이를 흐뭇하게 걸을 수 있다. 평지나 다름없는 드넓은 고원에는 키 낮춘 초목들이 서로서로 어깨를 겯고 있다. 그 사이로 단정히 놓인 목계단을 따라 걸으면 천상으로 오르는 듯 황홀하기까지 하다.
그 소요유(逍遙遊)의 쾌감을 한껏 부풀리며 일찍부터 길을 서두른다. 밖에는 바람이 불고 새들이 수런대고 고양이가 지나간다. 노인이 걸어가고 아가씨가 종종걸음을 친다. 청소차가 지나가고 자동차가 달려간다. 나는 마을을 지나고 강변을 달리고 고개를 넘고, 그리고 숲으로 들어선다. 사방은 푸른 환(環)을 두른 듯 아득히 벌어 있고, 골짜기 사이로 점점이 마을이 보인다.
이제부터는 숫제 걸어서 가야 한다. 수없이 왔던 곳이지만 여전히 새로운 길이다. 들메끈을 고쳐 매고 발걸음을 내디딘다. 두 발을 들었다 놨다 바지런히 움직이며 봉우리를 향해 간다. 내딛는 걸음에 리듬이 실리고 몸도 마음도 생기가 돋는다. 휴일이라서 그런지 사람도 제법 많다. 말소리를 듣자 하니 팔도 사람이 다 모인 듯 다채롭기도 하거니와 모두가 한 곳을 향해 걷는다는 사실이 어쩐지 뭉클하다.
꽃과 나무, 새소리, 바람 소리와 더불어 걷고 또 걷는다. 몸에는 땀이 배고 후끈 더위까지 느껴진다. 이쯤 되면 슬슬 지루해지기 시작한다. 발걸음이 느려지고 꼭대기를 더듬는 횟수가 점점 잦아진다. 그곳은 아직도 아득히 멀다. 달릴 수도 없고 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아니 갈 수도 없는 곳. 머리 위에 산 하나를 이고서 터벅터벅 걸어간다.
이윽고 산마루. ‘좋다’ 소리가 절로 나온다. 예가 바로 하늘 아래 첫 동네일까. 바람도 햇살도 나무도 풀도 모두가 상큼 삽상하다. 숨통이 트이고 걸음은 다시 날아갈 듯 가볍다. 표지석을 지나고 돌탑을 돌아 널찍한 바위 끝에 선다. 첩첩 봉우리 사이로 산안개가 흐른다. 먼 듯 가까운 듯 까마귀가 날고 살뜰하게 바람이 불어온다. 언제 다 오를까 돌아서고 싶던 마음은 온데간데없고, 여기 이렇게 있는 것만이 못내 느껍다.
새삼 그 공로를 두 발에 돌리고 싶다. 오른발 왼발을 번갈아 내디디며 쉼 없이 걷기를 반복한 결과 마침내 이 산정에 이르지 않았는가. 두 발이 만약 걷기를 멈추고 무슨 까탈이라도 부렸다면 지금의 이 기분은 알지도 못했을 것이다. 끊임없이 같은 동작을 반복하기란 쉽지도 않거니와 지속하기도 어렵다. 그 지루함을 견디고 밀고 나아가야만 비로소 목적지에 닿는 법. 내 기꺼이 너희의 공을 인정하노라.
단언컨대 뭔가를 반복한다는 것은 위대한 일이다. 걷기는 물론이고 숨을 쉬고, 맥박이 뛰고, 심장이 박동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그것은 멈추지 않고 반복해야만 얻어지는 생명의 리듬이다. 갑자기 숨쉬기가 힘들고 맥박이 불규칙하고 심장이 쿵쿵거린다면, 누구라도 대번 목숨을 위협받고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으리라. 우리의 생명은 한순간도 그 경계를 벗어나서는 곤란하다. 호흡도 맥박도 고르게 연속되어야만 목숨을 부지할 수 있으니 부지런히 움직여서 리듬을 타야 한다. 그것이 삶의 조건이다. 바다의 파도도 밀려왔다 밀려가기를 반복하며 리듬을 만들어 낸다. 그것은 또한 살리는 힘이다. 죽음을 그러안고 기슭에 섰던 사람도 치어 오르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다시 힘을 얻지 않던가.
삶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반복으로 채워진다. 매일 비슷한 하루를 살고 어김없이 다가오는 계절을 맞으며 반복적으로 흘러간다. 우리의 삶은 저마다의 미세한 파동이 있을 뿐, 판에 박힌 되풀이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반복 속에는 놀라움이 살고 있다.
‘내려올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도 반복 속에 일어난 일이고,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는 사실도 반복이 알려준 것이다. 반복은 숨어 있는 것들을 발견하게 해 주고, 같은 자리를 파고들어 재능이 되게끔 해준다. 그럴 때 우리는 화들짝 놀라움을 느낀다.
하늘과 바람과 검푸른 산자락만 있는 이 망망한 곳에서 자꾸 가슴이 벅차 온다. 다만 좀 길게 걸었을 뿐인데 이런 기쁨을 맛보다니! 성공한다는 것도 결국은 누가 얼마나 오래 반복하느냐에 달린 것이 아닐까. 모든 깨닫기는 어쩌면 반복 속에 있을지도 모른다.
이윽고 산마루. ‘좋다’ 소리가 절로 나온다. 예가 바로 하늘 아래 첫 동네일까. 바람도 햇살도 나무도 풀도 모두가 상큼 삽상하다. 숨통이 트이고 걸음은 다시 날아갈 듯 가볍다. 표지석을 지나고 돌탑을 돌아 널찍한 바위 끝에 선다. 첩첩 봉우리 사이로 산안개가 흐른다. 먼 듯 가까운 듯 까마귀가 날고 살뜰하게 바람이 불어온다. 언제 다 오를까 돌아서고 싶던 마음은 온데간데없고, 여기 이렇게 있는 것만이 못내 느껍다.
새삼 그 공로를 두 발에 돌리고 싶다. 오른발 왼발을 번갈아 내디디며 쉼 없이 걷기를 반복한 결과 마침내 이 산정에 이르지 않았는가. 두 발이 만약 걷기를 멈추고 무슨 까탈이라도 부렸다면 지금의 이 기분은 알지도 못했을 것이다. 끊임없이 같은 동작을 반복하기란 쉽지도 않거니와 지속하기도 어렵다. 그 지루함을 견디고 밀고 나아가야만 비로소 목적지에 닿는 법. 내 기꺼이 너희의 공을 인정하노라.
단언컨대 뭔가를 반복한다는 것은 위대한 일이다. 걷기는 물론이고 숨을 쉬고, 맥박이 뛰고, 심장이 박동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그것은 멈추지 않고 반복해야만 얻어지는 생명의 리듬이다. 갑자기 숨쉬기가 힘들고 맥박이 불규칙하고 심장이 쿵쿵거린다면, 누구라도 대번 목숨을 위협받고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으리라. 우리의 생명은 한순간도 그 경계를 벗어나서는 곤란하다. 호흡도 맥박도 고르게 연속되어야만 목숨을 부지할 수 있으니 부지런히 움직여서 리듬을 타야 한다. 그것이 삶의 조건이다. 바다의 파도도 밀려왔다 밀려가기를 반복하며 리듬을 만들어 낸다. 그것은 또한 살리는 힘이다. 죽음을 그러안고 기슭에 섰던 사람도 치어 오르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다시 힘을 얻지 않던가.
삶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반복으로 채워진다. 매일 비슷한 하루를 살고 어김없이 다가오는 계절을 맞으며 반복적으로 흘러간다. 우리의 삶은 저마다의 미세한 파동이 있을 뿐, 판에 박힌 되풀이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반복 속에는 놀라움이 살고 있다.
‘내려올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도 반복 속에 일어난 일이고,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는 사실도 반복이 알려준 것이다. 반복은 숨어 있는 것들을 발견하게 해 주고, 같은 자리를 파고들어 재능이 되게끔 해준다. 그럴 때 우리는 화들짝 놀라움을 느낀다.
하늘과 바람과 검푸른 산자락만 있는 이 망망한 곳에서 자꾸 가슴이 벅차 온다. 다만 좀 길게 걸었을 뿐인데 이런 기쁨을 맛보다니! 성공한다는 것도 결국은 누가 얼마나 오래 반복하느냐에 달린 것이 아닐까. 모든 깨닫기는 어쩌면 반복 속에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