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꽃 - 박용수 광주동신고 교사·수필가
2022년 02월 20일(일) 18:10 가가
지독한 대인 기피증이라도 앓고 있는 걸까. 담장 옆에 서 있는 녀석이 얄밉다. 봄가을 호시절엔 꼼짝도 않더니, 무슨 오기를 꼬장꼬장 부리는지, 눈을 허옇게 뒤집어쓰고서야 밤새 몇 송이를 붉게 피웠다. 부끄러워 한겨울을 택한 걸까. 아니면 자신의 고고한 빛깔을 다른 꽃과 비교당하기 싫은 자존심 때문일까. 앞마당 동백꽃이 유난히 시붉다.
녀석은 나를 무척 닮았다. 낯설거나 사람 많은 곳을 싫어하는 것 말이다. 호젓하고 한적한 곳이 좋다. 간혹 지인들이 따돌려도 좋다. 실상 혼자 있는 시간이 충만하고 행복할 때가 더 많아서 스스로 나를 따돌리며 바지런히 산다. 자전거도 혼자 타고 낚시도 혼자 하고 여행도 혼자 한다. 어느 장터에서 혼자 밥을 먹고, 돌아오는 길에 혼자 소주잔을 기울인다. 대신 구름이나 바람과 함께 걷고, 나무와 새들과 같이 깔깔거리고 눈과 비와 나란히 숨 쉰다. 그들과 더불어 잔다. 그렇게 헤어지면 집 앞에서 홀로 술잔을 기울이는 수줍음 많은 사내다. 동백을 보고 있으면 꼭 나를 보는 것 같다. 일부러 외톨이이길 자처하는 고집불통, 바닷가 동백을 볼 때면 어쩜 내가 동백을 빼쏘았다는 생각이 든다. 내 안에 수많은 동백이 뿌리를 단단히 박고 있음이다.
그래서 동백을 조금 알 것도 같다. 복잡한 세상, 혼자 사는 것도 썩 괜찮다. 겨울 꽃은 그래야 한다. 햇빛을 향해 앙탈을 부리지도 않고, 벌 나비들을 유혹할 일도 없이 혼자 피어야 겨울 꽃이다. 바람이 모질고 세찰수록 더 붉어지는 꽃, 백설을 머리에 이고도 몸속의 붉은 색을 틔우는 자기만의 단단한 결기가 있어야 한다.
어느 시인은 지독한 욕망이 이 겨울 꽃을 피운다고 했지만 그건 진짜 아픔을 몰라서 하는 말이다. 차가운 겨울에 게다가 붉디붉은 자신을 안에서 밖으로 툭툭 꺼내 놓을 때의 고통, 그리고 툭툭 떨어진 자신의 붉은 생 모가지를 보아야 하는 것은 또 얼마나 지독한 일이냐.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아가씨 /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
동백을 보고 있으면 이미자 씨의 노랫가락이 들려오고, 학창시절 읽었던 소설에서, 참 조숙했을 점순이의 모습이 후각적 이미지로 다가온다. 무엇에 떠밀리듯 퍽 쓰러졌는데, 그 바람에 내 몸뚱이도 점순이와 겹쳐서 쓰러졌다. 그리고 알싸하면서도 향긋한 냄새가 정신을 아찔하게 했는데, 그것이 무엇일까. 또 그때 점순이가 한 “너 말 말라”라는 의미는 또 무엇일까. 아직도 웃음이 나오고 그 모습이 생강나무 향기처럼 떠오른다.
동백을 보고 있으면 항상 그녀가 떠오른다. 진도인가 신안 어느 바닷가에서 보초를 서던 군인을 무작정 따라 올라왔다는 여고생, 아무것도 모르는 사내에게 운명을 바치고 그해가 가기도 전에 버림받아 툭 떨어진 꽃, 차비를 손에 쥐어 주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라는 내 말에 연신 고개를 흔들며, 아버지에게 맞아 죽으나 여기서 죽으나 마찬가지니 돌아갈 수 없다며 이번엔 내 손을 붙들며 울먹이던 그녀, 그 사내가 좋아서가 아니라 섬이 싫고, 도시가 좋아 왔다는 앳된 그 말이 떠오른다.
동백은 나무에서 한 번 피고, 툭 떨어져 땅에서 붉게 피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보는 이의 마음에서 붉게 세 번 피고 진다는데, 지금도 어느 누구의 마음을 수줍게 물들이고 있으면 좋겠다.
동백은 많은 사연을 담고 피는 꽃이다. 슬픈 이야기도 애틋한 이야기도 사람 사는 이야기들이다. 이 혹한에 동백마저 없었다면 나 혼자 길고 삭막한 이 겨울을 어떻게 보냈을까.
그리 보니 동백은 나를 닮은 것이 아니고 나 또한 동백을 닮은 것이 아니다. 우린 서로 남남이자 서로가 닮았다. 동백이 피었으니 곧 봄이다. 이 녀석이 피었으니 여기저기 게으른 봄 꽃들이 실눈을 뜨지 않겠는가.
오는 주말에는 동백을 보러 강진이나 신안으로 갈까. 오동도로 갈까. 먼저 여수에 들러 일박하고 다음날 강진에서 점심을 먹고 신안이나 완도에서 또 하룻밤을 묵는 하는 남도 여행, 동백 여행도 괜찮을 것 같다.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아가씨 /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
동백을 보고 있으면 이미자 씨의 노랫가락이 들려오고, 학창시절 읽었던 소설에서, 참 조숙했을 점순이의 모습이 후각적 이미지로 다가온다. 무엇에 떠밀리듯 퍽 쓰러졌는데, 그 바람에 내 몸뚱이도 점순이와 겹쳐서 쓰러졌다. 그리고 알싸하면서도 향긋한 냄새가 정신을 아찔하게 했는데, 그것이 무엇일까. 또 그때 점순이가 한 “너 말 말라”라는 의미는 또 무엇일까. 아직도 웃음이 나오고 그 모습이 생강나무 향기처럼 떠오른다.
동백을 보고 있으면 항상 그녀가 떠오른다. 진도인가 신안 어느 바닷가에서 보초를 서던 군인을 무작정 따라 올라왔다는 여고생, 아무것도 모르는 사내에게 운명을 바치고 그해가 가기도 전에 버림받아 툭 떨어진 꽃, 차비를 손에 쥐어 주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라는 내 말에 연신 고개를 흔들며, 아버지에게 맞아 죽으나 여기서 죽으나 마찬가지니 돌아갈 수 없다며 이번엔 내 손을 붙들며 울먹이던 그녀, 그 사내가 좋아서가 아니라 섬이 싫고, 도시가 좋아 왔다는 앳된 그 말이 떠오른다.
동백은 나무에서 한 번 피고, 툭 떨어져 땅에서 붉게 피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보는 이의 마음에서 붉게 세 번 피고 진다는데, 지금도 어느 누구의 마음을 수줍게 물들이고 있으면 좋겠다.
동백은 많은 사연을 담고 피는 꽃이다. 슬픈 이야기도 애틋한 이야기도 사람 사는 이야기들이다. 이 혹한에 동백마저 없었다면 나 혼자 길고 삭막한 이 겨울을 어떻게 보냈을까.
그리 보니 동백은 나를 닮은 것이 아니고 나 또한 동백을 닮은 것이 아니다. 우린 서로 남남이자 서로가 닮았다. 동백이 피었으니 곧 봄이다. 이 녀석이 피었으니 여기저기 게으른 봄 꽃들이 실눈을 뜨지 않겠는가.
오는 주말에는 동백을 보러 강진이나 신안으로 갈까. 오동도로 갈까. 먼저 여수에 들러 일박하고 다음날 강진에서 점심을 먹고 신안이나 완도에서 또 하룻밤을 묵는 하는 남도 여행, 동백 여행도 괜찮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