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향한 사유-고성혁 시인
2022년 02월 09일(수) 04:00
눈 덮인 겨울 들판을 걷는다. 칼바람으로 부딪쳐 오는 냉기에 걸음을 뗄 수가 없다. 순례자처럼 드러누운 들판이 성 밖의 지친 사람들 같다. 2월이라 해도 아직 끝나지 않은 추위는 살을 에듯 날을 세운다.

“매운 계절(季節)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北方)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高原)/ 서릿발 칼날 진 그 우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감아 생각해 볼 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이육사 ‘절정’ 전문)

육사의 더 나아갈 수 없는 단애(斷崖)의 강박감이 민족의 비극과 맞물려 이 겨울 들판처럼 너무나 오롯하다. 2차 대전 모스크바에 남겨진 독일군의 고립도 이랬을까. 그들의 철모에 부딪는 러시아군의 총검 같은 바람. 누군가의 헛된 욕심 때문에 자신들의 뜻과 상관없이 온 세상을 적대해야만 했던 그들의 고통이 생생해진다. 그래서일까. 강변에 버려진 스티로폼 조각과 빈 병, 찢긴 채 어지러이 날리는 포대 자루가 인간의 비뚠 욕심처럼 적나라하다. 황갈색으로 텅 비어 있는 벌판, 추위가 마지막 깃발처럼 펄럭이는 들판을 걸으며 나의 남루를 돌아본다. 낮이 이성의 시간이라면 밤은 감성의 시간이라고, 그래서 “밤이 선생”이라고 한 황현산 교수를 생각한다. 그분의 말씀처럼 겨울도 층계참처럼 뒤를 돌아보게 하는 계절이다.

삶이 갈수록 피폐해지고 있다. 자연의 법칙을 넘어선 속도는 우리 삶의 터전을 냉혹한 한겨울 속으로 내동댕이쳤다. 그리하여 우리 삶은 바람 부는 겨울 갈대처럼 바짝 말랐다. 앞은 눈보라 가득 검은 구름이 몰려오고, 옆은 얼음 덮인 강변에 뼈만 남은 갈대와 억새가 세차게 흔들린다. 뒤는 어떤가. 그저 텅 비어 있을 뿐이다. 어디에도 우리가 이룩한 성과는 보이지 않는다. 휘황한 번영이 아닌, 비탄과 고통의 미래로 내몰리고 있는데도 진실을 말하는 사람들의 말을 귀여겨듣지 않는다. 마치 미국 영화 ‘돈 룩 업’(don’t look up)을 보는 것처럼. 속수무책이다. ‘돈 룩 업’을 외치는 정치인들의 페이크에 속아 마침내 지구의 종말을 맞는 광경은 끔찍하다. 영화 내내 위태한 풍자가 계속되지만 결국 시간은 무의미하게 흘러 혜성은 지구와 충돌하고 만다.

환경재단은 이제 지구 멸망까지 2시간 13분 남았다고 한다.(환경재단의 세계의 환경위기 시각은 현재 저녁 9시 47분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고 아래만 보고 있다. 홍수처럼 쏟아지는 소셜 미디어 정보, 팩트와 거짓을 가릴 수 없는 혼탁. 패거리와 붕당 정치, 난무하는 혐오와 협잡. 최선도 차선도 아닌 차악을 뽑는 선거. 알다시피 이 모든 건 우리의 책임이다. 인간은 지구 안 다른 생물처럼 ‘세입자’의 하나일 뿐이다. 안락한 현실을 좇아 지속가능한 미래의 삶을 망가뜨리는 부정한 처신이 얼마나 많은가.

지구를 지켜내야 한다. 오랜 세월 지속되고 있는 코로나는 걷잡을 수 없는 팬데믹 이후의 삶에 대한 경고이다. 과거를 보면 그 사람의 미래를 아는 법. 과거로부터 미래를 길어 올리는 것이니 이 겨울의 마지막 터널에서 우리 모두 봄다운 봄을 위해 우리 삶의 방식을 사유하면 좋겠다. 긴 겨울 추위에 떤 얼어붙은 심장에 뜨거운 피를 돌게 하고, 얼어붙은 뿌리에 푸른 생기를 불어넣을 희망을 위해. 자신의 삶을 간곡히 되돌아보고 마음을 다해 하심(下心) 하는 자세야말로 우리를 미래로 향하게 하지 않을까.

우리 삶을 억지로라도 뒤돌아보게 하는 겨울이다. 성경은 2000년 전 다시 오겠다고 약속하신 예수가 “굶주린 사람, 목마른 사람, 나그네, 헐벗은 사람, 병든 사람, 감옥에 갇힌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한다.(청파교회 김기석 목사) 그 이유를 사유하며 세찬 바람에 떠는 강변을 바라본다. 얼어붙은 강물 귀퉁이에서 한 무리 오리 떼가 푸드덕 날아오른다. 흘러가는 강물과, 오리의 발에 묻어 솟구쳐 오른 물방울은 본디 같은 물결이었다. 이 겨울과 곧 다가올 봄도 맞닿아 있다. 혹한에도 소나무는 푸르고 동백은 이미 꽃망울을 머금어 우리에게 생각의 말미를 주고 있다. 서둘러야 한다. 정직한 ‘룩 업’이 절실한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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