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세대의 분노와 기성세대의 책무-김희송 전남대 5·18연구소 연구교수
2022년 02월 07일(월) 23:00 가가
제20대 대통령 선거는 20대의 표심에 사회적 관심이 쏠린 첫 번째 선거로 기록될 전망이다. 이른바 ‘20대 남성 현상’이 3월 9일 대통령 선거에서 어떤 결과로 표출될 것인지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최근 청년세대 남성들이 드러내는 새로운 정체성 정치는 기존의 사회적 흐름과는 다른 모습으로서 사회적 관심과 아울러 다양한 논쟁을 촉발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대통령 후보자들은 청년세대 맞춤형 공약을 경쟁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20대의 표심에 집중하는 정치권의 행태를 보면 이들이 청년세대의 현실을 직시하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왜냐하면 청년세대 맞춤형 공약의 일부는 청년세대를 남성과 여성으로 분리시키면서 젠더 갈등을 유발하거나, 청년의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진 진단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거 캠프의 한 인사는 ‘20대 남성 현상’을 설명하면서 “남학생들이 군대 가기 전 술 마시느라 학점이 잘 나오지 않는다”고 진단했다. 그러나 현실의 남학생들은 자신이 원하는 시기에 군대에 가기 위해서 자원봉사와 헌혈을 통해 봉사 점수를 채워야 하는 세대이다. 참고로 헌혈은 1점으로 산정된다고 한다. 이런 처지의 남학생들에게 ‘술’ 어쩌고 하는 진단은 분노를 촉발하는 모욕의 언사이다.
필자도 청년세대의 현실을 제대로 알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세상의 변화만큼 학생들의 인식도 빠르게 변화하고 있기에 최근에는 학생들의 현실을 잘 모르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 때가 있다. 코로나19의 영향으로 강의가 비대면으로 진행되면서 소통과 지적 교류는 더 힘들어졌다. 이런 이유로 지난 2학기 강의는 무리였지만 대면 강의로 진행했다. 이렇게 오랜만에 마주한 학생들은 또 달라져 있었다.
사회문제 강의에서 학생들이 제안한 토론 주제는 ‘20대의 코인 투자’였다. 토론에 앞서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 코인 투자 경험의 유무를 물었을 때 3분의 1 정도의 학생이 투자 경험이 있다고 대답했다. 코인의 투기성에 대해서는 모든 학생이 공유하고 있었다. 학생들 스스로 코인의 등락은 그저 운에 맡길 수 밖에 없는 투기적 요소가 강하다고 진단했다. 로또와 같은 사행성의 측면이 크지만 코인에 투자할 수밖에 없는 청년세대의 경제적 처지에 대해서도 대체로 공감했다. 청년세대가 향후 근로 소득이나 부동산, 주식을 통해서 자산 증식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여건이기에 대체제로 코인을 선택했다는 주장이었다.
최근 이슈가 되는 ‘20대 남성 현상’은 미래의 희망이 사라진 자리를 혐오와 분노로 채워 가면서 발생하는 위기적 징후라고 할 수 있다. 기성세대가 된 ‘586세대’에게 20대 청년의 시기는 군부 독재의 폭압이 맹위를 떨치는 엄혹한 시대였다. 국가 폭력의 잔인한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가 도래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희망의 시대였다. 청춘의 투쟁으로 권위주의 정권의 폭압을 종식시키겠다는 결기가 있었던 그런 시대였다. “나이 서른에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라는 읊조림은 절망이 아닌 희망에 관한 찬가였다.
반면에 2022년의 20대에게 현재는 절망의 시대이다. 부모 세대보다 경제적으로 더 잘살 수 있다는 희망은 사라졌다. 대학 졸업장만 있으면 취업이 가능했던 ‘386세대’의 황금기는 되돌아오지 않음을 잘 알고 있다. 이렇게 희망이 사라진 자리를 청년세대의 남성들은 혐오와 분노의 양가적 감정으로 채워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현재 청년세대는 기성세대가 된 586세대의 자녀라는 것이다. 청년세대의 문제가 기성세대 자신의 문제와 맞닿아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기성세대는 자신의 안락한 노후를 설계하기에 앞서서 자식들의 문제인 20대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갈 것인지 청년세대와 함께 지혜를 모아야 한다. 우리 사회가 청년들의 분투를 요구할 것이 아니라 지금과 같은 체제를 만든 기성세대의 무능과 안이함에 대해 반성과 사과를 먼저 전해야 한다. 그리고 작금의 어려움이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지? 어떻게 변화를 만들어 갈 수 있는지? 이러한 변화가 도래할 때까지 청년의 문제를 사회의 문제로 어떤 방식으로 책임질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 약속이 필요한 시점이다.
청년세대의 분노는 병적 징후가 아닌 희망의 징후일 수 있다. 왜냐하면 혐오와 적대는 자기 파괴적 결과로 귀결될 위험이 있는 반면에 분노는 새로운 변화의 동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청년세대의 분노는 자신의 문제가 사회 구조의 문제임을 깨우쳐 가는 과정일 수 있기에 희망의 지점이다. 따라서 기성세대는 청년세대를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혐오의 언어로 구획할 것이 아니라, 분노에 응답할 필요가 있다. 분노에 대한 응답은 희망이 사라진 청년세대를 위하여 기성세대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리일 것이다. 새로운 시대는 열어갈 수 없더라도 희망의 싹을 키워가는 2022년을 만들어 갔으면 한다.
최근 이슈가 되는 ‘20대 남성 현상’은 미래의 희망이 사라진 자리를 혐오와 분노로 채워 가면서 발생하는 위기적 징후라고 할 수 있다. 기성세대가 된 ‘586세대’에게 20대 청년의 시기는 군부 독재의 폭압이 맹위를 떨치는 엄혹한 시대였다. 국가 폭력의 잔인한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가 도래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희망의 시대였다. 청춘의 투쟁으로 권위주의 정권의 폭압을 종식시키겠다는 결기가 있었던 그런 시대였다. “나이 서른에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라는 읊조림은 절망이 아닌 희망에 관한 찬가였다.
반면에 2022년의 20대에게 현재는 절망의 시대이다. 부모 세대보다 경제적으로 더 잘살 수 있다는 희망은 사라졌다. 대학 졸업장만 있으면 취업이 가능했던 ‘386세대’의 황금기는 되돌아오지 않음을 잘 알고 있다. 이렇게 희망이 사라진 자리를 청년세대의 남성들은 혐오와 분노의 양가적 감정으로 채워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현재 청년세대는 기성세대가 된 586세대의 자녀라는 것이다. 청년세대의 문제가 기성세대 자신의 문제와 맞닿아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기성세대는 자신의 안락한 노후를 설계하기에 앞서서 자식들의 문제인 20대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갈 것인지 청년세대와 함께 지혜를 모아야 한다. 우리 사회가 청년들의 분투를 요구할 것이 아니라 지금과 같은 체제를 만든 기성세대의 무능과 안이함에 대해 반성과 사과를 먼저 전해야 한다. 그리고 작금의 어려움이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지? 어떻게 변화를 만들어 갈 수 있는지? 이러한 변화가 도래할 때까지 청년의 문제를 사회의 문제로 어떤 방식으로 책임질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 약속이 필요한 시점이다.
청년세대의 분노는 병적 징후가 아닌 희망의 징후일 수 있다. 왜냐하면 혐오와 적대는 자기 파괴적 결과로 귀결될 위험이 있는 반면에 분노는 새로운 변화의 동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청년세대의 분노는 자신의 문제가 사회 구조의 문제임을 깨우쳐 가는 과정일 수 있기에 희망의 지점이다. 따라서 기성세대는 청년세대를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혐오의 언어로 구획할 것이 아니라, 분노에 응답할 필요가 있다. 분노에 대한 응답은 희망이 사라진 청년세대를 위하여 기성세대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리일 것이다. 새로운 시대는 열어갈 수 없더라도 희망의 싹을 키워가는 2022년을 만들어 갔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