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성(無聲) 시대-김향남 수필가·조선대 외래교수
2022년 01월 23일(일) 22:30
1. 최근 나에겐 여러 개의 방이 생겼다. 특별한 설계나 공정도 없이 뚝딱 지었지만 씀씀이 하나는 기막히게 좋다. 작은 네모 상자 속의 방은 이른바 사이버스페이스. 그곳에는 한계라는 것이 없다. 시간도 거리도 제한이 없고 목소리나 외모 따위에 신경 쓸 일도 없다. ‘슥삭’ 터치할 수 있는 손가락 하나와 해독 가능한 시력만 있으면 된다. 앉거나 눕거나 그것도 자유다.

방들은 저 옛날의 사랑방이거나 우물가 혹은 빨래터와 다름없다. 더러 휴게소가 되기도 하고 회의장이나 토론장이 되기도 한다. 효율성으로 따지자면 단연 최상급, 누구도 외면하지 못하는 문명의 이기(利器)다. 넘치거나 궁하거나 외롭거나 즐겁거나 바쁘거나 안 바쁘거나 쉴 새 없이 접속하고 끊임없이 차단하는, 너와 나, 우리들의 방이다.



2. 밤은 깊은데 사랑방의 이야기꽃은 시들 줄 모른다. 간간이 울리던 알림음이 연속으로 터진다. 애당초 꺼버리거나 무음으로 두지 않고 진동상태로 놔둔 게 문제이긴 하다. 이건 소리와 소리 없음(무음) 사이에 얼치기로 걸려 있다는 말이다. 나는 무심한 척 에돌아 있을 뿐이지 사실은 잔뜩 기울어 있는 것이다. 저만치 밀어둔 폰을 끌어와 화면을 터치한다.

새로 구매했다는 이모티콘으로 한껏 기분을 내는 ㄱ과 공짜만 주로 쓴다는 ㄴ, 감기가 들었는데 약은 먹기 싫다는 ㄷ과 약 먹는 것 하나는 끝내주게 좋아한다는 ㄹ, 퇴근하고 한잔 먹고 싶다는 ㅁ과 어느 바닷가 석양을 찍어 올린 ㅂ 등등 오며 가며 보태 놓은 말들이 계통 없이 이어지고 있다. ㄱ이 뜬금없이 자신의 키스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자청한다. 이런 밤엔 이런 이야기가 제격이라는 듯 마실 나온 사람들도 맞장구를 쳐 댄다.

ㄱ은 피골이 상접하고 눈만 퀭해서 별 인기가 없었단다. 운 좋게도 여자 친구가 생겼는데 지금 생각해도 너무 예뻤다. 하지만 콤플렉스 덩어리인 자신을 친구 이상으로 생각해 줄 거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그래서 손을 잡는 데만도 2년이 걸렸다나? 하여간 입영통지서를 받아 놓고 ㄱ은 마침내 결심이라는 걸 했다. 맑은 겨울날 어느 산속 한 동굴, 안에는 타닥타닥 모닥불이 타고 있고 밖에서는 사락사락 눈이 내린다….

ㄱ의 이야기에 여기서는 크크 웃고, 저기서는 그래 그래서요? 다음을 재촉한다. 둥둥 북을 울리고 얼쑤! 추임새도 넣는다. 갖가지 추임새(이모티콘)는 말보다 풍성하고 몸짓보다 강렬하다. 쑥스러워 못하는 말도 간단하게 해결된다.

이야기기는 싱겁게 끝났다. 타닥거리는 모닥불과 휘날리는 눈발과 흐르는 시간, 그리고 남자와 여자…. ㄱ의 이야기는 거기서 그쳤지만 함께 북장구를 쳤던 사람들, 그들의 세포 하나쯤은 건드리고도 남았을 것이다.

밤은 깊고 야릇하게 달뜬 미소를 입가에 매단 채 모두 각자의 공간으로 돌아갔다. 후끈했던 네모 상자는 일순 식은 화로처럼 썰렁해져 버렸다.

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 텔레비전은 저 혼자 떠들고 소파에 누운 그의 입은 반쯤 벌어져 있다. 저이도 누군가와 장단을 맞추고 있는 게 분명하다. 나를 보자 흠칫 폰을 내려놓는데, 내 머릿속에는 순간 쓸데없는 의심과 호기심의 덩어리가 딕셔너리 넘어가듯 번뜩거리며 지나간다.



3. 오늘 아침, 이 방 저 방이 분주하다. 이 방에서는 간밤의 뒷담화가 이어지고 저 방에서는 모닝커피가 날아온다. 모임 공지가 뜨고, 심심한데 뭐하냐는 미국 친구의 카톡까지 꺼진 화로에 다시 불이 들어온다.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는다. 까닭 없이 피곤하고 심드렁하다. 게다가 누구도 딱히 나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도 아니다. 나는 눈으로만 훑어볼 뿐 침묵을 이어간다. 누가 혹시라도 물어 오면 운전 중이었거나 아직 보지 못했다고 에두르면 된다. 아예 잠수를 타버리거나….

그러나 가만, 내 침묵이 쌓이기도 전에 저 침묵이 더 완강해질지도 모른다. 내 폰은 벌써 아무 기척이 없지 않은가. 오후가 되고 저녁이 되고 이윽고 밤이 되어도 끝내 살아날 기미라곤 없을지도 모른다. 굳게 다문 저 네모 상자가 멀고도 아득하다. 설령 몸을 떨어 부르르 신호음을 보내 와도 필요한 건 입이 아니라 손가락이다. 말이 아니라 글자다. 이제 우리의 만남은 얼굴은커녕 음성조차 갖고 있지 않은 문자의 층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얼굴을 보며 서로의 표정을 읽어 내야 하는 수고도, 굳이 목청을 가다듬을 필요도 없어졌다. 하지만 얼굴도 소리도 없는 세상은 뭔가 단단히 잃어버린 세계인 것만 같다.

이래저래 내 입에선 소리 한마디 새어 나오지 못한 채 하루가 가고 있다. 이러다간 진짜 산 입에 거미줄이 걸릴지도 모르겠다. 오, 그건 확실히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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