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꽃보다 아름다운 소녀였던 할머니들-최성훈 육군보병학교 교관
2022년 01월 12일(수) 23:10
곱디고운 자태의 할머님을 처음 뵌 날은 벚꽃잎이 눈송이처럼 흩날리던 따스한 어느 봄날이었습니다.

“위안부 피해자이고 나이는 여든 일곱 살, 김복동입니다.” 나눔의 집을 방문한 우리에게 처음으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 한마디를 들었을 때 느꼈던 먹먹함은 시간이 지난 지금도 가슴속 생채기가 되어 아프기만 합니다.

1926년생인 할머니는 불과 열네 살의 나이에 일본군에 의해 낮설고 물선 곳으로 끌려가 여성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겪으셨습니다. 부모님의 사랑 속에 아무 걱정 없이 뛰어놀기에도 부족한 나이의 이 어린 소녀는 할머니가 되어 일제의 만행을 폭로했습니다. 위안부라는 일종의 금기어를 애써 외면하고 살던 우리 사회에, 더욱이 성폭력 피해 여성이 더 큰 피해 의식을 안고 살아가던 그 시절에, 내가 위안부라고 말하기는 더욱 어려웠습니다.

그분들 중에는 결혼을 하셔서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이 또 아들을 낳아 손자를 본 분도 계시는데, 그 손자 앞에서 ‘내가 일제강점기 시절에 위안부였다’라고 말하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1991년 8월 14일 고 김학순 할머니는 “우리가 강요에 못 이겨 했던 그 일을 역사에 남겨 두어야 한다”면서 기자회견을 통해 일본군에 의해 강요된 위안부 생활을 증언하셨습니다. 그럼으로써 ‘한국인 최초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 증언자’가 되었습니다.

더욱이 1991년 10월에 MBC 문화방송 창사 30주년 기념 특집극으로 방송된 ‘여명의 눈동자’라는 드라마는 애써 외면하던 위안부 문제를 우리 사회의 공론장으로 이끌어 내는 역할을 했습니다.(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위안부로 끌려가는 역으로 열연을 보여 준 배우가 채시라씨였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과 뜻있는 시민사회가 서울 종로구 옛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 정부의 사과를 요구하는 시위를 처음 한 날이 고 김학순 할머님의 기자회견 다음 해인 1992년 1월 8일 수요일이었습니다. 시위는 한여름 무더위에도, 한겨울 동장군의 위세에도, 옷이 흠뻑 젖는 폭우에도 불구하고 매주 수요일이면 같은 장소에서 어김없이 열렸습니다.

2022년 올해는 수요 시위가 열린 지 30돌이 됩니다. 이 수요시위는 지금까지 모두 1525차례, 단일 주제의 최장기 시위로 기네스북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할머님들이 요구하는 것은 경제적 보상이 아닌 일본 정부의 진정 어린 사과를 요구하고 있는데 일본은 오히려 이를 외면하고 있습니다.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 240명 중 이제 생존자는 13명뿐입니다. 사과하지 않는 일본은 어쩌면 이분들이 모두 돌아가시고 그로 인해 수요 시위가 없어지기를 바라고 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더욱이 존 마크 램지어 미국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공식 직함은 ‘일본 법학 미쓰비시 교수’로 어려서부터 일본에서 자라고 교육을 받았으며, 일본어로 책을 출판했다.)는 “위안부 강제 징용은 거짓이고 입증 문서가 없다”는 망언을 하며, 일본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합니다. 2022년 임인년 새해 우리 모두는 할머님들의 아픔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추신: 아침에 제일 먼저 일어나서 곱게 머리를 빗어 내리시고, 몇 벌 되지 않으신 옷중에 가장 깨끗하고 정갈한 옷을 골라 입으시던 김복동 할머니는 2019년 94세로 영면하셨다. 2015년에는 국가인권위원회로부터 대한민국 인권상 국민훈장을 받으셨다.)
오피니언더보기

기사 목록

광주일보 PC버전
검색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