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고령인으로 살기-박행순 전남대학교 명예교수
2022년 01월 12일(수) 02:00
일본과 유럽뿐 아니라 최근에는 우리나라에서도 65세부터 74세까지를 준(準)고령인, 75세 이상을 고령인으로 나누는 추세이다. 필자는 11년 전 대학에서 정년퇴직하고 한창 ‘인생 이모작’이 유행이던 때에 네팔에서 객원 교수로 준고령인의 시간대를 살았다.

코로나로 한국에 돌아와 살면서 75세를 맞았다. 자연스레 지난 세월들을 돌아보면서 여생을 어디에서, 어떻게 보낼 것인가를 숙고하게 되었다.

한국에서의 삶은 모국어를 쓰는 편안함, 기계 문명이 주는 편리함, 다양하고 맛있으며 풍성한 먹거리 등, 얼마 동안은 코로나로 인한 불편함을 빼고는 행복했으나 무료함과 무력감도 함께 왔다. 스마트폰을 가지고 노는 어린 아이들, 세계관이 너무 달라서 대화하기 어려운 젊은이들, 고령 운전자를 눈치 주는 사회, 다가올 메타버스(metaverse)의 3차원 가상세계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과 호기심 등 다양한 감정이 혼재했다.

네팔에는 우리가 점점 잃어가는 것들이 남아 있다. 그간 함께했던 몇몇 젊은이들은 어버이날에 찾아오고 네팔을 오갈 때마다 공항에 나오며 어려운 일들을 해결해 주어서 꽤 정이 들었다. 골목에서 뛰노는 동네 아이들은 한 세대 전의 우리 모습이고 사람들은 만날 때 마다 밥 먹었는가, 차 마셨는가 묻는 것이 인사이다. 전기가 나갔다가 들어오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한다. 결핍이 있어서 가능한 행복, 역설적으로 한국에서는 맛볼 수 없는 기쁨이 있다.

그러나 대학에서 실망스러운 경험도 하였다. 학생들은 아침 첫 시간에 줄줄이 지각하면서 들어가도 되냐고 예의 바르게 허락을 구함으로 계속해서 수업을 방해했다. 한두 사람의 과제물을 모두 베끼고 시험 때에는 반 전체가 과감하고 적극적인 부정을 저질렀다. 지적하고 타일러도 외부인인 나를 불편해 할 뿐, 자발적인 내적 각성이 없으니 변화를 기대할 수 없었다. 감독자의 눈만 피할 수 있으면 시험 부정은 잘못으로 인식하지 않는 듯 했다. 정치인들을 도둑이라고 맹렬히 비난할 때, 자신들은 가장 정직한 사람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듯해서 쓴웃음을 짓곤 했다.

작년 10월 코로나가 좀 누그러진 틈을 타서 네팔에 돌아왔다. 한인 선교사가 세운 신설 초등학교를 방문했는데 일곱 살부터 열두 살까지 21명의 학생들이 있는 크리스천 기숙학교였다. 교사가 교실에 들어가면 학생들은 모두 일어서서 한목소리로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수업 시간에 늦은 학생들은 들어가도 되냐고 허락을 구했다. 간단한 과제를 주었더니 한 학생이 아직 글을 못 익힌 친구 노트를 가져다가 대신 써 주었다. 이 초등학교에서 보는 것들이 전혀 생소하지 않은 것은 이미 네팔 대학에서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대학 교육은 초등 교육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대학생들이 과제물을 베끼고 시험 시간에 서로 답을 알려주는 것은 부정이 아닌 우정의 표현, 초등학교부터 길들여온 습관으로 일종의 상생 문화인지도 모른다.

아이들에게 십 년 후에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물었더니 의사, 간호사, 교사, 과학자, 배우 등 다양한 장래 희망들을 말했다. 영어 실력이 제법이다 싶었는데 알고 보니 아이들은 영어 성경을 읽고 외우고 노래하면서 영어를 익히고 있었다. 영어는 네팔의 공용어이고 이들의 꿈을 이루어 줄 도구이기도 하다.

이 네팔 어린이들에게 지각하지 말 것, 숙제는 스스로 할 것, 시험 시간에 서로 가르쳐 주는 것은 부정행위로서 해서는 안 된다는 것, 특히 사람의 눈만 피하면 된다는 생각이 굳어지기 전에 천지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치고 싶다.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를 쓴 로버트 풀검(Robert Fulghum)이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초등 교육의 중요성을 명쾌하게 각인시켰다.

필자는 네팔과 한국을 오가며 과거와 미래를 아우르는 삶속에서 네팔의 꿈나무들과 함께 희망을 키우려고 한다. 보람 있고 행복한 고령인의 삶을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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