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윤석열’을 만들었는가-전진우 언론인·작가
2022년 01월 11일(화) 02:00
문재인 대통령(이하 문재인)은 착한 사람이다. 그의 선한 성품은 눈빛을 보면 알 수 있다. 사악한 인간은 수시로 낯빛을 바꾼다지만 흔들리는 눈빛마저 감추기는 어렵다. 그러나 최고위 리더십으로서 선함은 반드시 좋은 결과만을 가져오지는 않는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악함과 이기심은 단순히 선함과 자비로움으로 이길 수 없다. 필요하다면 거짓·술수 등을 사용해 신민의 이기심·악행을 다스려야 한다.”

물론 15∼16세기 중세 유럽 봉건 영주의 리더십과 오늘날의 민주주의 리더십을 동렬에 놓을 수는 없다. 마키아벨리가 이런 말을 덧붙였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한다. “단 이럴 경우(거짓·술수 등을 사용할 경우) 그 사용 기한은 짧아야 하며 근본적인 덕성으로 회복해야 한다.” 마키아벨리가 부연한 ‘근본적인 덕성’을 동양적으로 표현한다면 선정(善政)이 될 것이니, 선한 리더십을 굳이 마다할 이유는 없을 터이다. 하나 원칙 없는 정치, 질서 없는 민주주의가 파쇼 독재를 불러왔다는 역사적 사실 또한 가볍게 넘길 수는 없지 않은가.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이하 윤석열)가 예전에 일갈하기를 “나는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 조직에 충성할 뿐이다”라고 했다. 멋지게 들린 말이었다. 권력에 굴하지 않는 강골 검사의 이미지는 마침내 그를 제1야당의 대선후보로까지 끌어올렸다. 윤석열은 내친 김에 공정과 상식, 정의의 아이콘이 되고자 했다. 거기에 반(反) 문재인 깃발만 들어올리면 그만이었다.

무리수이자 자충수였다. 그가 내세우는 가치란 어쩔 수 없이 검찰 문화의 소산일 터인데 대한민국 검찰의 공정·상식·정의가 보편적 가치로 공인받은 적은 없다. 불공정과 불의의 전형이라고 할 검찰 패밀리의 제 식구 감싸기는 이미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오히려 지난날 권력의 첨병이었던 검찰이 정치적 중립이란 우산을 쓰고 스스로 권력이 되려 한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검찰 개혁은 시대적 과제가 되었다. 그러니 뼛속부터 검사인 윤석열이 말하는 공정과 정의란 애초부터 무리수였다고 할 수밖에 없다. 윤석열의 캐치프레이즈가 자충수였음은 ‘본(본인) 부(부인) 장(장모)’ 의혹만으로도 명백하다. 의혹이 모두 사실은 아닐지언정 그 자신이 공정·상식·정의를 말한다면 듣는 사람이 민망하지 않겠는가.

‘별의 순간’을 노래하던 ‘늙은 멘토’는 떠나고, 만만할 것 같던 ‘젊은 대표’는 전혀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의 앞길이 순탄해 보이지 않는 이유다. 그는 다시 예전의 윤석열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예전의 윤석열’이라면 역시 강직한 검사의 이미지를 되살리는 것일 터인데, 아우라가 사라진 이미지가 되살아날 수 있을지는 두고 볼 일이다.

문재인은 애당초 조국과 윤석열을 잘라야 했다. 대단치도 않은 표창장 위조라 해도 도덕성을 앞세웠던 정권의 상징적인 인물이 ‘내로남불’이었다면 읍참마속(泣斬馬謖) 했어야 한다. 아울러 검찰 개혁에 저항했던 윤석열도 함께 잘라야 했다. 검찰총장의 임기 보장이란 민주적 리더십(하위 가치)보다 검찰 개혁의 시대적 과제(상위 가치)를 완수하겠다는 대통령의 의지가 앞서야 했다. ‘윤석열도 문재인 정부의 검찰총장’이란 지나가던 소도 웃을 메시지를 내놓기 전에 국민과의 대화를 통해 검찰 개혁을 추동할 수 있는 국민적 지지를 구했어야 했다. 결국 오늘의 윤석열을 만든 일등공신은 문재인이었다는 역설이 성립된다. ‘민주주의적 리더십’(대놓고 말하면 우유부단한 리더십)이 초래한 결과라면 너무 박한 평가인가.

미국의 ‘트럼프 현상’을 진단한 저널리스트 출신의 수전 제이코비는 그의 저서 ‘반(反)지성주의 시대’에서 이런 말을 했다. “민주주의는 국민이 무감각해져 있거나 무지할 경우 잘 작동하지 않는다. 바로 이런 까닭에 우리는 트럼프 정부를 갖고 있는 것이다.”

결론은 국민에, 시민에, 유권자에 달렸다는 얘기다. 어떤 정부를 갖고 싶은가. 어떤 공동체의 미래를 맞고 싶은가. 유권자가 선택할 일이다. 부담 또한 유권자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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