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꽃-박용수 광주동신고 교사·수필가
2022년 01월 10일(월) 03:00
마을 회관이다. 커다란 팽나무 아래 고아한 정자가 자리를 잡고 그 옆 회관에 노인들이 옹기종기 앉아 있다. 몇은 걸터앉고, 또 몇은 누워 있다. 유리창에는 하얀 성에꽃이 쩍쩍 피었고, 문틈으로 동장군이 쉴 새 없이 윙윙거리며 방안을 기웃거린다.

젊은이들이 떠난 마을, 이가 빠지거나 귀가 잘 들리지 않거나 허리가 굽은 이들이 회관에 모여 철 지난 허수아비처럼 서로 등을 기대고 있다. 누군 감자와 고구마를, 누군 달걀과 홍시를 들고 나왔다. 소주병과 호박죽도 방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지난가을 들판이 회관에 들어앉았다.

노란 오이꽃과 선홍색 팥꽃을 보고 물었을 때, 시큰둥하던 노인들이다. 감자꽃이나 장다리꽃을 보고도 그냥 무덤덤하게 여기던 사람들이다. 그들이 꽃 이야기하는 것은 좀체 듣기 어렵다. 꽃은 무슨 꽃 사방 천지가 다 꽃인데, 누군가 그랬다.

“꽃도 좋지만, 열매가 잘 여물어야 구경도 가제.”

“올해 파꽃 지고 감자꽃 피는 늦봄에는 서울 놀러갈 수 있으려나.”

“그나저나 삐끗한 허리는 좀 어쩌요.”

“해남 댁 허리 고치려면 콩꽃 많이 피어야 쓰겄네잉” 노인들에게 꽃은 그런 의미이다.

시골 사람들은 평생 꽃을 심고 가꾼 이들이다. 그들이 심고 피운 꽃은 넓은 들판 가득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깨꽃 배추꽃 장다리꽃 보리꽃 나락꽃 호박꽃 외꽃 상추꽃 얼갈이꽃. 사시사철 피고 진다. 논밭 가득 심었으되, 팔기 위해 심지 않기에 출하도 시드는 것도 걱정하지 않는 사람들, 꽃이 져야만 열매가 맺힌다는 것을 알기에, 오히려 꽃이 시들거나 지는 것을 순리대로 받아들이는 이들이다.

보기 위한 꽃과 열매를 거두기 위한 꽃은 다르다. 그들이 가꾸는 꽃은 하우스 안에서 그리고 화분으로 옮겨지는 귀족이 아니다. 들판에서 비바람 맞고 견뎌야 하는 것들이다. 색깔도 진하고 향기도 그윽하며 크고 우아한 ‘눈으로만 보는’ 공주 같은 꽃이 아니다. 무더기로 서로 어울려 피고 열매도 튼실하게 맺어야 하는, 자기들 모습을 그대로 닮은, 눈보다 ‘입으로 들어가야 하는’ 꽃이다. 온 산을 물들이는 진달래나 호수 주변에 무덕무덕 핀 벚꽃처럼 화사하지도 않지만, 사람은 물론 산과 들판에 사는 뭍짐승 모두의 생명줄을 쥐고 있는 꽃, 그런 꽃이다.

회관이 시끄럽다. 춘양댁이 삶은 옥수수를 머리에 이고 싱글벙글 나타난다. 손자가 어디 회사에 취직했단다. 춘양댁은 이제 죽어도 좋단다. 이제 살판 났는데 진짜 죽을 거냐고 마을 사람들이 해죽해죽 웃는다. 노인들 이가 춘양댁 옥수수처럼 듬성듬성 빠졌다.

그때 능주댁 전화가 울린다. 전화를 받은 능주댁이 마포 바지 방구 빠지듯 휑하니 회관을 빠져나간다. 이미 속사정을 알고 있는지라, 마을 사람들 얼굴이 어둡다. 서울 사는 둘째 아들이 수술했단다. 누군가 호주머니에서 만 원짜리 몇 장을 꺼내 방바닥에 놓는다. 여기저기 한 푼 두 푼이 쌓인다. 서울 가는 여비라도 보태겠단다. 잘 먹던 감자나 옥수수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음식을 도란도란 나눠 먹는 이들이 식구다. 슬픔을 나누고 마음을 주고받는 것은 사람뿐이다.

이보시오, 도암 양반, 무슨 꽃이 가장 오래 피는지 아시오. 아 그야 보리하고 나락꽃이지, 백일홍은 백일이나 핀담서. 무슨 말씀, 가장 오래 피는 꽃은 사람 꽃이여, 백 년도 더 피잖아.

그럼 가장 이삔 꽃은 먼 꽃이당가. 당연히 고것도 사람꽃이제. 사람보담 더 이삔 꽃이 어디 있을라고. 그래 맞아, 목포댁이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고추를 딸 때 가장 이쁘등만. 여수댁 모내기 험서 웃는 주름살 봐 이보다 더 이삔 꽃이 있을라고.

도암 양반과 여수댁이 살갑게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근디 꽃도 시들면 안 이쁘대끼 사람도 늙으니 하나도 안 이쁘든디. 먼 소리랑가. 사람은 마음씨를 이쁘게 먹으면 늙어서도 더 향기롭지, 꽃은 이뻐야 하고, 사람은 향기가 나야 하는 벱이여, 저 쌈짓돈 꺼내는, 사람꽃이 진짜 이쁘고 향기로운 꽃이여.

버스를 기다리는 능주댁이 추울세라 마을 노인들이 둥그렇게 꽃처럼 바람을 막아 준다. 나도 그 틈에 얼굴을 내밀고 온기를 더해 본다. 능주댁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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