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제국의 융성과 콘클라베-김종배 전 국회의원
2022년 01월 06일(목) 23:10
시오노 나나미의 저서 ‘로마인 이야기’에는 작금의 우리나라 정치에 시사점을 주는 내용이 적잖게 담겨 있다. 그는 로마인들이 지중해 연안국가를 천 년 동안이나 지배하고 번영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윤리나 정신보다 그들이 만들어 놓은 법과 제도에서 찾아야 한다고 봤다. 지성에서는 그리스인보다 못하고, 체력에서는 켈트족이나 게르만족보다 못하고, 기술력에서는 에투루리아인보다 못하고, 경제력에서는 카르타고인보다 못했지만 말이다.

로마는 기원전 509년에 왕정을 끝내고 공화정을 실시했다. 불과 1세기도 안되는 우리의 공화정의 역사와 비교하면 실로 엄청 오랜 기간의 역사이다. 이미 로마는 공화정 이전 왕정시대에도 왕과 원로원, 민회라는 세 개 기둥이 서로 견제하고 협력하면서 지배했다. 그중에서 최고 책임자인 왕은 로마시민 전원으로 구성된 민회에서 직선으로 뽑았다. 원전 509년에 시작했던 공화정에서는 왕의 전횡을 막기 위해서 왕 대신 집정관 제도를 마련하여 두 명을 뽑아서 그들이 최고 지도자로서 서로 권력을 분산하여 로마를 지배하도록 했다.

이미 2500년 전부터 로마는 제왕적 1인 독재 체제를 끝냈던 것이다. 제왕적 대통령제에 대한 폐해를 너무 잘 알고 있으면서도 국가 권력의 분산을 위한 체제 개편을 위해서 논의조차 못하고 있는 우리의 처지와 비교해 보면 놀랄 만하다.

그리스의 정치 지도자인 폴리비오스는 로마가 융성할 수 있었던 것은 왕정, 귀족정, 민주정이라는 정치 체제를 고집하지 않고 집정관 제도를 통해 왕정의 장점을 살리고 원로원 제도를 통해 귀족정의 장점을, 민회를 통해 민주정의 장점을 살린 공화정의 독자적인 정치 체제 덕분이라고 지적했다.

로마는 전쟁의 패자까지도 포용하여 로마인으로 동화시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에 한때 30만의 신이 있었다고 말한다. 배타적인 일신교가 아니라 다신교를 인정하면서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포용력과 개방성을 가진 민족이었기 때문에 로마가 천년 제국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봤다.

필자는 로마의 긴 역사를 보면서 또 한 가지 큰 교훈을 얻고자 한다. ‘콘클라베’(Conclave)라는 로마 교황을 뽑는 제도이다. 가장 민주적인 대표 선출 방식으로 연구되고 있다. 실로 콘클라베의 역사도 단기간에 이루어진 제도가 아니다. 수세기 동안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변천을 거듭했던 제도이다. 4세기경만 하더라도 교황은 그 지방의 성직자와 신자들의 직선에 의해서 선출했다. 그러나 황제와 귀족들이 선거에 개입하여 공정성을 잃은 이후 부단한 개혁을 통해 오늘날 추기경들이 교황을 뽑는 콘클라베를 탄생시켰다.

투표의 방법이나 개표 방법 역시 수세기에 걸쳐서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외부의 영향력을 차단하고 집중력을 갖기 위해서 추기경들을 한 곳에 감금하여 빵과 물만을 제공하고 교황을 선출했던 것이다.

필자가 하고 싶은 얘기는 아무리 좋은 제도와 법을 갖춰도 운용자가 누구냐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세계 최고의 영성과 지성을 겸비한 종교 지도자인 추기경들이 참여한 선거라서 돋보이는 것일까? 민주주의는 법과 제도도 중요하지만 운용자의 격을 늘 향상시키면서 발전하는 것 같다. 오랜 역사가 주는 교훈은 우리의 현실 정치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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