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이란 무엇인가-김주선 조선대 부설연구소 인문학연구원 연구교수
2022년 01월 05일(수) 03:00 가가
재난은 인간에게 끔찍하고 막대한 물리적 정신적 피해를 준다. 전쟁, 학살, 홍수, 가뭄, 지진, 쓰나미, 산사태는 물론 건물 붕괴나 각종 폭발, 방사능 유출, 세월호 사건 등은 모두 인간의 삶을 절망과 파탄으로 몰고 간다. 최근 유행 중인 코로나19도 마찬가지다. 생명을 위한 보건 조치 속에서 수많은 자영업자가 파산했고 공장이 문을 닫았으며 생활고로 자살한 사람이 속출했다. 우리 시대의 재난은 자연재해와 문명이 만들어 낸 재해까지 더해진 상태다.
그런데 그 다양한 사건의 원인과 피해 규모, 사회적 의미는 모두 다르다. 가령 세월호 사건과 팬데믹의 세부 사항은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다. 재난적 사건의 공통점은 어디서 찾아야 할까.
사전에서 정의하는 재난은 뜻밖에 일어난 재앙과 고난이다. 누구도 바라지 않거나 의도하지 않았던 변고나 천재지변이 재난이다. 과연 재난은 언제나 계획 바깥에서, 미리 생각하거나 측정할 수 없는 차원에서 발생하는 것 같기도 하다. 세월호에 탑승했던 사람 중 누구도 배의 침몰을 생각하지 못했다. 9·11테러 당시 세계무역센터의 사람들도 비행기의 돌진을 예상하진 않았다. 코로나19가 만들어낸 전 지구적 재난 사태를 상상한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다. 후쿠시마 원전도, 대학살도 마찬가지다. 도대체 왜 이런 끔찍한 일을 겪어야 하는 것일까. 희생된 사람들은 일상을 보내고 있었을 뿐인데. 재난이란 불운의 결과인가. 하필 사건이 발생한 그 시간 그 자리에 있어서, 예컨대 기후 위기가 심각한 이 시대에 태어나서 호주 산불과 같은 재난적 사태를 겪는 것일까.
재난이 언제나 불가항력의 사건이라면 인간에게 남은 것은 운명적 순응밖에 없다. 마치 신이 존재했던 먼 과거처럼, 이제는 누구에게 비는 줄도 모를 무력한 마음으로 재난이 피해가기만을 바라는 게 인간의 몫이다. 그러나 기술과학의 획기적 발전은 자연재해나 사회적 재해를 단순한 불운으로만 생각하지 않도록 만들어 준다. 우선 현대 사회의 재난은 대개 기술 문명의 차원에서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건물 붕괴, 가스 폭발, 방사능 유출, 배의 침몰 등은 설비나 구조물의 안전을 위한 설계나 지침을 명확히 따르지 않는 경우 발생하기 쉽다. 9·11 이후 항공기 조종실은 조종사와 허가받은 객실 승무원 이외의 출입이 불가하게 되었다. 자연 재난 역시 관리의 영역에 있다. 지진은 미리 예측할 수 있으며 가뭄이나 홍수에 대비해 댐을 건설할 수 있다. 자연 발화로 인한 산불의 예방은 불가능하나 화재 진압을 위한 시스템 구축은 가능하다.
그러니 문제는 재난에 대비한 방재 활동의 한계다. 똑같은 홍수나 가뭄, 태풍 등의 자연재해를 겪어도 피해는 동일하지 않다. 경제 활동과 권력이 밀집된 곳은 피해가 적거나 복구가 빠르다. 원자력 발전소는 서울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다. 전 지구적 재난인 코로나19는 의료 환경의 격차에 따라 치사 가능성을 달리한다. 우리는 재난 피해가 집중되는 곳의 기술적 경제적 환경이 다른 곳에 비해 얼마나 열악한지 알아야 한다. 재난은 경제적 정치적 문제이고, 법의 문제다. 달리 말해 사회의 정의 문제이자 윤리적 분배의 문제다. 우리가 누리는 안전은 어딘가의 불안전을 대가로 얻은 이익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 답을 굳이 쓸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속담은 정말 큰 지혜다. 그래도 기술만능주의에 대한 경계와 대비하는 삶의 고단함과 지루함, 막막함은 부기하고 싶다. 결국 모든 걸 대비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전에서 정의하는 재난은 뜻밖에 일어난 재앙과 고난이다. 누구도 바라지 않거나 의도하지 않았던 변고나 천재지변이 재난이다. 과연 재난은 언제나 계획 바깥에서, 미리 생각하거나 측정할 수 없는 차원에서 발생하는 것 같기도 하다. 세월호에 탑승했던 사람 중 누구도 배의 침몰을 생각하지 못했다. 9·11테러 당시 세계무역센터의 사람들도 비행기의 돌진을 예상하진 않았다. 코로나19가 만들어낸 전 지구적 재난 사태를 상상한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다. 후쿠시마 원전도, 대학살도 마찬가지다. 도대체 왜 이런 끔찍한 일을 겪어야 하는 것일까. 희생된 사람들은 일상을 보내고 있었을 뿐인데. 재난이란 불운의 결과인가. 하필 사건이 발생한 그 시간 그 자리에 있어서, 예컨대 기후 위기가 심각한 이 시대에 태어나서 호주 산불과 같은 재난적 사태를 겪는 것일까.
그러니 문제는 재난에 대비한 방재 활동의 한계다. 똑같은 홍수나 가뭄, 태풍 등의 자연재해를 겪어도 피해는 동일하지 않다. 경제 활동과 권력이 밀집된 곳은 피해가 적거나 복구가 빠르다. 원자력 발전소는 서울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다. 전 지구적 재난인 코로나19는 의료 환경의 격차에 따라 치사 가능성을 달리한다. 우리는 재난 피해가 집중되는 곳의 기술적 경제적 환경이 다른 곳에 비해 얼마나 열악한지 알아야 한다. 재난은 경제적 정치적 문제이고, 법의 문제다. 달리 말해 사회의 정의 문제이자 윤리적 분배의 문제다. 우리가 누리는 안전은 어딘가의 불안전을 대가로 얻은 이익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 답을 굳이 쓸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속담은 정말 큰 지혜다. 그래도 기술만능주의에 대한 경계와 대비하는 삶의 고단함과 지루함, 막막함은 부기하고 싶다. 결국 모든 걸 대비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