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사흘을 위하여-김창균 광주예술고 교감
2021년 12월 29일(수) 01:00 가가
45년 동안 오른팔을 든 채 살아온 인도 남성이 얼마 전 화제가 되었다. 힌두교 신 시바에게 자신을 바쳤다는 그는 70이 훨씬 넘은 지금까지도 혼자 산에서 고행 중인데, 처음 2년여의 극심한 고통 이후 팔의 감각을 모두 잃어 현재는 오른손의 피부와 손톱이 서로 붙고 어깨뼈가 굳은 상태라고 한다. 사두(Sadhu: 힌두교 수행자)로서 속세의 유혹을 떨치고자 자처한 일이기에 육체적 고통은 정신적 행복에 이르는 길이 아니었던가 싶다.
실제로 가능한 일인가 하는 의구심도 들지만, 예전에도 드물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우리나라에도 조갑천장(爪甲穿掌: 손톱이 손바닥을 뚫다)이란 한자성어로 전하는 이야기가 있다. 조선 중종 때 양연(梁淵)이란 분은 나이 마흔에 비로소 공부에 뜻을 두며, 문장을 이루기 전에는 결코 왼손을 펴지 않겠노라 다짐하였다. 그리하여 왼손을 꼭 쥔 채 붕대로 감은 후 절로 들어가 공부에 매진한 지 여러 해, 마침내 과거에 급제한 후 비로소 왼손을 펴려 하니 그사이 자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가 펼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고 한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가장 아꼈던 제자 황상(黃裳)은 나이 70이 넘어서도 초서(抄書: 책의 중요 대목을 베껴 써가며 읽는 방식)를 계속하였다. 사람들이 ‘그 나이에 초서는 해서 무엇 하느냐?’고 묻자 ‘과골삼천(과骨三穿: 복사뼈에 세 번 구멍이 나다)한 스승에 대면 내 공부는 공부도 아니다’라고 답했다. 다산 선생이 강진에서의 18년 유배 생활 동안 책상다리로 두 무릎을 딱 붙이고 공부와 집필에 매진하다 보니, 튀어나온 복사뼈가 세 번이나 구멍이 났다는 거다. 과연 그 스승에 그 제자답다.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머릿속 셈만으로 안 됨을, 정말 독하게 행동으로 옮겨야 함을 깨우쳐 주는 이야기들이다. 그러고 보니 올해도 이제 사흘 남았다. 새해 아침에 멋진 한 해를 위한 목표를 세웠을 것인데, 한 해의 족적을 오늘 돌아보며 만족할 사람은 몇이나 될까. 새해 결심은 흔히 작심삼일(作心三日) 즉, 한번 마음 먹어도 사흘 정도밖에 못 가기에, 이를 극복하는 길은 사흘마다 결심하는 데 있다는 농담을 던진 이가 있었다. 영국의 심리학자 리처드 와이즈만(Richard Wiseman) 교수도 3000명을 대상으로 6개월 간 ‘생각과 행동의 연관 관계’를 연구한 결과, 생각한 대로 성과를 얻는 사람은 12%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웬만한 의지와 결단을 지녔다 치더라도 주변 상황에 휘둘리거나 힘든 현실을 이기지 못하는 게 다반사이기에, 종착역에 이르기도 전에 이런 저런 핑곗거리를 내세우게 된다. 결국 단단하기만 했던 결심에서 절절함은 사라지고,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는 버나드 쇼의 묘비명마냥 일쑤 용두사미로 끝나게 마련이다.
한 해의 끝자락에서 ‘이미 늦었다’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늦었다’의 기준이 어디에 있겠는가. 또한 시간이나 능력의 한계, 외부의 간섭을 이유로 내세울 수도 있겠지만, 인생은 다양한 속도를 가진 변주곡이라는 비유처럼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는 과정일 뿐이다. 행운의 여신은 온 힘을 다해 인내하고 노력하는 자에게 미소를 보낸다는 서양의 금언도 있으니, 절실함이 있었던가를 되돌아보며 연초의 결심을 다시 실행한다면 사흘 후 내년이 새로울 것이다.
하루하루 지내는 동안 여러 난관을 거쳤겠지만, 이를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로 여기는 긍정 사고도 필요한 때다. 정호승 시인은 ‘내 등의 짐’에서 “내 등에 짐이 없었다면/ 나는 세상을 바로 살지 못했을 것입니다/ 내 등에 있는 짐 때문에 늘 조심하면서/ 바르게 성실하게 살아왔습니다.”라고 했다. 이어 “물살이 센 냇물을 건널 때는/ 등에 짐이 있어야 물에 휩쓸리지 않고/ 화물차가 언덕을 오를 때는 짐을 실어야/ 헛바퀴가 돌지 않듯이/ 내 등에 짐이 나를 불의와 안일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게 했으며/ 삶의 고개 하나 하나를 잘 넘게 하였습니다.”라고 했으니, 어깨를 짓누르는 짐을 질 수 있다는 자체에 감사하는 시인의 생각을 공유하는 것도 괜찮겠다.
웬만한 의지와 결단을 지녔다 치더라도 주변 상황에 휘둘리거나 힘든 현실을 이기지 못하는 게 다반사이기에, 종착역에 이르기도 전에 이런 저런 핑곗거리를 내세우게 된다. 결국 단단하기만 했던 결심에서 절절함은 사라지고,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는 버나드 쇼의 묘비명마냥 일쑤 용두사미로 끝나게 마련이다.
한 해의 끝자락에서 ‘이미 늦었다’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늦었다’의 기준이 어디에 있겠는가. 또한 시간이나 능력의 한계, 외부의 간섭을 이유로 내세울 수도 있겠지만, 인생은 다양한 속도를 가진 변주곡이라는 비유처럼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는 과정일 뿐이다. 행운의 여신은 온 힘을 다해 인내하고 노력하는 자에게 미소를 보낸다는 서양의 금언도 있으니, 절실함이 있었던가를 되돌아보며 연초의 결심을 다시 실행한다면 사흘 후 내년이 새로울 것이다.
하루하루 지내는 동안 여러 난관을 거쳤겠지만, 이를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로 여기는 긍정 사고도 필요한 때다. 정호승 시인은 ‘내 등의 짐’에서 “내 등에 짐이 없었다면/ 나는 세상을 바로 살지 못했을 것입니다/ 내 등에 있는 짐 때문에 늘 조심하면서/ 바르게 성실하게 살아왔습니다.”라고 했다. 이어 “물살이 센 냇물을 건널 때는/ 등에 짐이 있어야 물에 휩쓸리지 않고/ 화물차가 언덕을 오를 때는 짐을 실어야/ 헛바퀴가 돌지 않듯이/ 내 등에 짐이 나를 불의와 안일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게 했으며/ 삶의 고개 하나 하나를 잘 넘게 하였습니다.”라고 했으니, 어깨를 짓누르는 짐을 질 수 있다는 자체에 감사하는 시인의 생각을 공유하는 것도 괜찮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