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드시 기억해야 할 이름 ‘이금주’-임 용 철 위민연구원 이사·다큐 감독
2021년 12월 27일(월) 00:15
얼마 전 광주에서 향년 102세 할머니의 장례식이 있었다. 누군가는 천수를 누리셨다고 하고, 빈소에는 대통령부터 국회의원 등 알 만한 사람들의 조화가 가득해 마지막 가시는 길이 그리 쓸쓸해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조문객들은 한결같이 “마지막까지 할머니의 한을 못 풀어 드렸다”고 애통해 했다.

할머니의 이름은 이금주. ‘태평양전쟁희생자 광주유족회 회장’이 할머니 생존의 직함이다. 한 세기를 훌쩍 넘긴 할머니의 삶을 되돌아보면, 1920년 평안남도 순천에서 6남매 중 맏딸로 태어난 할머니는 스물한 살 때인 1940년 10월 결혼한다. 한데 남편은 결혼 2년째 되던 1942년 11월 8개월 된 아들과 부인을 남겨 두고 강제로 일본 해군 군무원이 되어 남태평양으로 끌려간다. 급기야 1945년 4월 전사 통지서 한 장으로 남편과 사별하게 된다.

스물아홉 살 때인 1948년 친정 식구들과 함께 광주로 이주하면서 광주는 제2의 고향이 되었다. 일제 피해자들은 1987년 6월 항쟁 이후 본격적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일제에 의해 사랑하는 남편을 잃고 누구보다 고통과 통한의 세월을 보내야 했던 할머니는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는 일에 앞장서고, 고희를 앞둔 1988년 ‘태평양전쟁희생자 광주유족회’ 초대 회장을 맡아서 30년 넘게 일제 피해자들의 인권 회복을 위해 한길을 걸어간다.

광주시 남구 진월동 본인의 집 2층에 사무실 겸 사랑방을 만들어 마음 의지할 곳 없는 일제 피해자와 유족들을 보듬고, 해남이든 완도든 피해자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곳곳을 다니며 광주유족회 산하에 47개 지부를 만들고, 1000여 명이 넘는 회원을 규합했다.

1992년 원고 1273명이 참여한 ‘광주 1000인 소송’을 시작으로, 귀국선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 소송, 일본군 ‘위안부’와 여자 근로정신대 피해자 등이 원고로 참여한 관부 재판 소송, B·C급 포로 감시원 소송, 미쓰비시 근로정신대 소송, 일본 외무성을 상대로 한일회담 문서 공개 소송 등 일본 정부와 전범 기업을 상대로 지금까지 7건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이금주 회장이 제기하였다. 재판 결과는 번번이 패소했지만 ‘관부 재판’과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 소송은 1심에서는 승소를 거두는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남기기도 하였다.

당시에는 인터넷이 발달한 시절이 아니었기에 일본에서 소송을 돕고 있는 지원 단체 관계자나 변호사들과 연락을 취하며 소송에 필요한 각종 서류를 원고들로부터 받아 정리해 다시 일본에 보내는 일부터 천여 명이 넘는 회원들에게 소식을 알리는 것까지 일일이 사람의 손으로 해야 했다. 이에 이금주 회장의 아들과 며느리, 손녀까지도 광주유족회 일을 같이 도울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이 회장과 피해자들의 줄기찬 투쟁 끝에 마침내 2004년 노무현 정부에서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 진상규명 등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어 우리 정부가 처음으로 본격적인 피해 조사에 나서는 역사적 전환점을 마련하게 된다.

할머니는 30년 동안 ‘되지도 않는 일’이라는 핀잔을 들으며 한일 정부와 싸웠지만 2011년 아끼던 며느리에 이어 아들마저 연달아 먼저 보내면서 사무실로 쓰던 허름한 집 한 채마저도 유지하기 힘들게 되었다. 결국 2012년 5월 광주 생활을 청산하고 손녀가 있는 순천으로 거처를 옮기게 됐다. 익숙한 생활 터전을 떠나 건강마저 쇠약해지면서 9년여 동안 순천의 한 요양병원에서 투병 생활을 이어오셨다. 그나마 100세 되던 2019년 12월 10일. 세계인권선언 71주년을 기념해 그동안 일제 피해자 권익을 위해 헌신해 온 공로를 인정받아 대통령으로부터 국민훈장 모란장을 병상에서 받은 것이 위로의 전부였다.

할머니의 못다 이룬 한은 이제 후세들에게 남겨졌다. 고인의 피와 땀의 결실인 태평양전쟁희생자 광주유족회의 각종 피해 사실 및 소송 자료는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사무실에 임시 보관되어 있다. 할머니의 마지막까지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가 곧 방송국에서 방영될 예정인데, 생전 이금주 회장님의 치열함이 묻어나는 자료들을 보면 다시 한번 고인의 삶에 경의를 표하게 된다.

하루라도 빨리 한일 관계가 해결되어 아직도 못다 푼 일제 강점기 피해자들의 한이 풀어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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