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소소한 교육 인권을 위하여-박혜자 전 국회의원
2021년 12월 23일(목) 04:30 가가
조금씩 조금씩 세상을 바꾼 시민들이 있다는 사실에 눈길을 둔 사람들은 많지 않다. 한 초등학생 덕분에 ‘살색’ 크레파스라는 인종차별적 명칭이 없어졌고, 초등학교 출석부 번호를 남학생부터 부여해온 관행을 없어지게 만든 사람도 한 평범한 가정주부였다. 소소하게 살아온 우리 이웃들이 해낸 일로, 국가인권위원회 진정을 통해 바로잡은 사례들이다.
지난 12월 10일은 세계인권선언 기념일이었다. 1948년 12월 10일 세계인권선언이 채택된 지 올해로 73주년을 맞았다. 매년 인권은 강조되지만 인권이 걸어가야 할 여정은 아직도 멀다. 일부 학교이긴 하지만 출석부나 자리에서 남녀가 구분되고, 화장실의 휴지를 제공하지 않고, 장애 학생이 차별되고, 규칙을 위반한 문제 학생을 범법자 취급하는 인식 등 인권 문제는 비일비재하다. 현실 속의 크고 작은 인권 문제들이 우리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교육부나 교육청의 노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단위 학교의 학생 생활 규정에서 성소수자나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 혐오 발언이나 행위를 금지하는 항목이 개선되고 있는지 묻고 있다. 복장이나 외모, 전자기기 소지 등을 교육하는 과정에서 학생들의 인권을 충분히 보호하고 있는지 살필 것을 권고하고 있다. 그럼에도 현장에서는 반인권적 갈등이 여전하다. 주목해야 할 대목은 이를 교육 활동의 위축으로 보는 관점이다. 학생들의 권리가 보장되자 교권이 축소되었다는 지적과 함께 인권과 교권의 경계선에서 움츠렸던 교육적 고민이 충돌하는 모습으로 등장했다.
교육 현장의 ‘교육적 조치’는 모호할 때가 많았다. 소통은 막히고, 학생은 상상할 수 없는 행동으로 교육적 상황을 흔들 때 등장한 교사의 행위를 정당방위라고 할 수 있을까? 관행으로 정당화된 현장 실습, 엘리트 스포츠를 위한 합숙 훈련, 다문화 갈등 등 그동안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됐던 체벌과 권리 침해가 점차 사라지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차별적 의식으로부터 생기는 근본 문제는 더 노력해야 할 과제다.
인권 조례가 만들어지자 일부 학생들에 의해 역기능을 부르는 사례도 있었다. 학생들이 교사들을 엮는 선제적 방어 행동은 교묘하게 악감정까지 깔고 진행되었다. 그렇더라도 교육 행정은 피해자 우선 논리 이외에는 그 어떤 방책도 제시하지 못하는 무기력함을 드러냈다. 물론 모두 과도기에 나타날 수 있는 현상들일 것이다. 노파심이 드는 것은 교사들의 활동이 아동 학대의 경계를 맴돌 수 있다는 점이다. 민감한 판단력보다 먼저 상황을 처리해야 할 때 자칫 말 한마디가 폭력이 될 수 있다. 교사들은 무지한 게 아니라 민원의 늪에 빠져 사건에 휘말리면서 뒤늦게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게 된다. 학생들이 자기 권리를 인지하지 못한 것만큼 교사들 역시 자기 권리를 충분히 인식하지 못해서 그렇다. 이 또한 인권 의식의 한계 때문이다.
민원의 형태로 등장한 사안에 대한 행정기관의 대처 역시 마찬가지다. 교사와 학생을 갑을관계라는 기본 프레임으로 설정한 탓에 일 처리를 기울어지게 할 수도 있다. 그렇게 징계라는 컨베이어벨트에 올려놓으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움직이게 되고 자신들은 자신들대로 업무 과신과 조직 보위에 갇히게 된다. 이것도 모두 균형을 잃은 행정력과 인권 의식의 한계에서 비롯된다.
여기서 학생 인권 조례의 제정 취지인 “학생의 존엄과 가치가 학교 교육 과정에서 보장되고 실현되도록 하자”는 초심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즉 ‘학생의 존엄과 가치’를 둘러싸고 학생들은 스스로 어떤 인권 의식을 정립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학교 제도의 핵심 뼈대인 학교 교육 과정에는 얼마나 반영되었고, 교사들의 교육 활동은 얼마나 보장되었는지 고쳐 물어야 한다.
인권선언일을 계기로 교육 현장에서 생기고 있는 오류에 대해 거듭 섬세하게 되묻자. 학생 인권 조례는 상징적 최소 장치일 뿐 교육 현장을 구체적으로 이끌 수 없다. 구체적인 내용을 채우는 일은 구성원들의 몫이다.
학생들이 학교 안에서 고쳐져야 할 반인권적 사례를 개선하고 교사들이 편의성에 끌리지 않는 가운데 자발적 인권 운동으로 정착되면 최상이다. 인권이 생활 속에서 꽃피우기 위해 학생들과 교사들의 인권 의식의 확장을 넘어 실천력 있게 뿌리내리길 희망한다. 그러기 위해 권력을 가진 행정의 균형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조례 수준에 못 미치는 인권 의식을 확장시키고, 인권 수혜자들의 자기 목소리가 담길 수 있는 환경을 제도화하여 인권이 생활 속에서 꽃필 수 있도록 하자. 그렇지 못하면 인권은 여전히 교문 앞에서 멈추고, 허울 좋은 구호로만 남고 말 것이다.
인권 조례가 만들어지자 일부 학생들에 의해 역기능을 부르는 사례도 있었다. 학생들이 교사들을 엮는 선제적 방어 행동은 교묘하게 악감정까지 깔고 진행되었다. 그렇더라도 교육 행정은 피해자 우선 논리 이외에는 그 어떤 방책도 제시하지 못하는 무기력함을 드러냈다. 물론 모두 과도기에 나타날 수 있는 현상들일 것이다. 노파심이 드는 것은 교사들의 활동이 아동 학대의 경계를 맴돌 수 있다는 점이다. 민감한 판단력보다 먼저 상황을 처리해야 할 때 자칫 말 한마디가 폭력이 될 수 있다. 교사들은 무지한 게 아니라 민원의 늪에 빠져 사건에 휘말리면서 뒤늦게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게 된다. 학생들이 자기 권리를 인지하지 못한 것만큼 교사들 역시 자기 권리를 충분히 인식하지 못해서 그렇다. 이 또한 인권 의식의 한계 때문이다.
민원의 형태로 등장한 사안에 대한 행정기관의 대처 역시 마찬가지다. 교사와 학생을 갑을관계라는 기본 프레임으로 설정한 탓에 일 처리를 기울어지게 할 수도 있다. 그렇게 징계라는 컨베이어벨트에 올려놓으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움직이게 되고 자신들은 자신들대로 업무 과신과 조직 보위에 갇히게 된다. 이것도 모두 균형을 잃은 행정력과 인권 의식의 한계에서 비롯된다.
여기서 학생 인권 조례의 제정 취지인 “학생의 존엄과 가치가 학교 교육 과정에서 보장되고 실현되도록 하자”는 초심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즉 ‘학생의 존엄과 가치’를 둘러싸고 학생들은 스스로 어떤 인권 의식을 정립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학교 제도의 핵심 뼈대인 학교 교육 과정에는 얼마나 반영되었고, 교사들의 교육 활동은 얼마나 보장되었는지 고쳐 물어야 한다.
인권선언일을 계기로 교육 현장에서 생기고 있는 오류에 대해 거듭 섬세하게 되묻자. 학생 인권 조례는 상징적 최소 장치일 뿐 교육 현장을 구체적으로 이끌 수 없다. 구체적인 내용을 채우는 일은 구성원들의 몫이다.
학생들이 학교 안에서 고쳐져야 할 반인권적 사례를 개선하고 교사들이 편의성에 끌리지 않는 가운데 자발적 인권 운동으로 정착되면 최상이다. 인권이 생활 속에서 꽃피우기 위해 학생들과 교사들의 인권 의식의 확장을 넘어 실천력 있게 뿌리내리길 희망한다. 그러기 위해 권력을 가진 행정의 균형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조례 수준에 못 미치는 인권 의식을 확장시키고, 인권 수혜자들의 자기 목소리가 담길 수 있는 환경을 제도화하여 인권이 생활 속에서 꽃필 수 있도록 하자. 그렇지 못하면 인권은 여전히 교문 앞에서 멈추고, 허울 좋은 구호로만 남고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