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에 ‘월남전 참전 기념탑’이 필요한 이유-윤 창 준 대한민국 월남전참전자회 광주시지부장
2021년 12월 21일(화) 21:00 가가
어떤 전쟁도 바람직하지 않다. 인명 살상을 초래하는 전쟁에는 승자도 패자도 없는 것이다. 우리가 전쟁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이다. 한국군의 첫 파병이 이뤄진 베트남전도 우리가 다시는 전쟁을 겪지 않아야 한다는 점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전쟁이다.
한국군의 월남 파병은 베트남 전쟁이 치열해진 1960년대 중반 미국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4·19의거를 거쳤지만 경제적으로는 세계 최빈국의 수준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었다. 연간 수출액은 총 5천만 달러 수준이었고, 국민 1인당 GNP는 100달러에도 미치지 못했다.
한국의 입장에서 월남전과 같이 위험한 전역에 아무런 해외 활동 경험조차 없는 국군을 파병하는 것은 어쩌면 국운을 가름할 중대사가 아닐 수 없었다. 한국으로서는 파병 요청을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6·25전쟁 때 국제사회의 도움에 대한 보은의 차원과 한·미간 상호 안전 보장 등 불가분의 관계가 얽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국내외적으로 처한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국군의 해외 파병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어떤 측면에서는 주도적으로 나섰다고 볼 수 있다. 제1차 파병은 의료 지원단이었다. 장교 34명, 사병 96명으로 편성된 제1 이동 외과병원 병력과 10명의 태권도 교관 요원이 1964년 9월 22일 자유 월남의 수도 사이공에 도착해 업무를 개시했다. 이어 이듬해 3월 제2차 파병으로 2천여 명의 건설 지원단(비둘기부대)을 파병했다.
월남 당국은 한국군의 성실·근면·친절성과 능력을 신뢰해, 평정 임무 수행에 필요한 전투부대 파병까지 요청한다. 그러나 전투부대 파병은 제1·2차의 인도적인 파병과 달리 찬반양론이 팽팽히 맞서 여론이 분분했다. 미국은 박정희 대통령을 백악관으로 초청해 최고 수준의 환대를 베푸는 한편 주한 미8군 사령관과 주한 미대사 등이 중재·교섭에 나서 한국 정부를 적극적으로 설득했다. 고심을 거듭했던 박 대통령과 한국 정부는 전투부대의 파병을 결정하고 1965년 10월 제2 해병 여단(청룡부대)과 수도 사단(맹호부대)을 파병했다. 제3차 파병이었다.
전투부대 추가 파병을 둘러싼 한국과 미국의 줄다리기는 험프리 미국 대통령의 두 차례 방한과 브라운 주한 대사의 역할로 인해 해결되었다. 이에 따라 1966년 9월 제4차 파병으로 제9사단(백마부대)이 파병됐다.
그 결과 주월 한국군은 1973년 3월 23일 최종적으로 철수할 때까지 8년 8개월 동안 연인원 32만 4864명이 의료·건설 지원과 분·소·중대 단위의 소부대 작전 및 대대·군단급의 대부대 작전을 전개했다. 아울러 한국군의 우수한 능력에 대해 우방 국가들의 신뢰를 받게 됐다.
한국군 월남 참전 총병력은 32만 4684명이었다. 이 가운데 전사 4601명, 순직 272명, 사망 226명 등 총 5천여 명이 이역만리 정글 전선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그러나 참전 용사들은 지금까지 합당한 예우를 받지 못하고 노환과 병마로 힘겨운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그렇지만 월남 참전 용사들이 벌어 온 달러가 근간이 돼 경부고속도로 개통과 산업화 기반 시설 구축에 결정적인 도움이 된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광주시는 파월 용사들에 대한 참전 수당이 전국에서 제일 낮을 뿐만 아니라 아직도 참전탑이 없는 지역으로 남아 있다. 월남전 참전탑은 월남전 참전 유공자의 명예 선양과 월남전 전몰 장병에 대한 추모, 특히 전후 세대를 위한 역사의 교육장으로 반드시 건립돼야 한다.
대한민국 월남전 참전자회 참전 기념탑은 서울 동작동 기념비와 부산·인천 등 대부분의 광역 도시에 존재하며, 전남에서도 영암·고흥·해남군 등에 월남전 참전 기념탑이 건립돼 있다. 민주와 인권의 도시인 광주에 ‘월남전 참전 기념탑’이 없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세계의 평화와 자유민주주의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위해서라도 광주에 ‘월남전 참전 기념탑’을 반드시 건립해야 할 것이다.
한국의 입장에서 월남전과 같이 위험한 전역에 아무런 해외 활동 경험조차 없는 국군을 파병하는 것은 어쩌면 국운을 가름할 중대사가 아닐 수 없었다. 한국으로서는 파병 요청을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6·25전쟁 때 국제사회의 도움에 대한 보은의 차원과 한·미간 상호 안전 보장 등 불가분의 관계가 얽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투부대 추가 파병을 둘러싼 한국과 미국의 줄다리기는 험프리 미국 대통령의 두 차례 방한과 브라운 주한 대사의 역할로 인해 해결되었다. 이에 따라 1966년 9월 제4차 파병으로 제9사단(백마부대)이 파병됐다.
그 결과 주월 한국군은 1973년 3월 23일 최종적으로 철수할 때까지 8년 8개월 동안 연인원 32만 4864명이 의료·건설 지원과 분·소·중대 단위의 소부대 작전 및 대대·군단급의 대부대 작전을 전개했다. 아울러 한국군의 우수한 능력에 대해 우방 국가들의 신뢰를 받게 됐다.
한국군 월남 참전 총병력은 32만 4684명이었다. 이 가운데 전사 4601명, 순직 272명, 사망 226명 등 총 5천여 명이 이역만리 정글 전선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그러나 참전 용사들은 지금까지 합당한 예우를 받지 못하고 노환과 병마로 힘겨운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그렇지만 월남 참전 용사들이 벌어 온 달러가 근간이 돼 경부고속도로 개통과 산업화 기반 시설 구축에 결정적인 도움이 된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광주시는 파월 용사들에 대한 참전 수당이 전국에서 제일 낮을 뿐만 아니라 아직도 참전탑이 없는 지역으로 남아 있다. 월남전 참전탑은 월남전 참전 유공자의 명예 선양과 월남전 전몰 장병에 대한 추모, 특히 전후 세대를 위한 역사의 교육장으로 반드시 건립돼야 한다.
대한민국 월남전 참전자회 참전 기념탑은 서울 동작동 기념비와 부산·인천 등 대부분의 광역 도시에 존재하며, 전남에서도 영암·고흥·해남군 등에 월남전 참전 기념탑이 건립돼 있다. 민주와 인권의 도시인 광주에 ‘월남전 참전 기념탑’이 없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세계의 평화와 자유민주주의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위해서라도 광주에 ‘월남전 참전 기념탑’을 반드시 건립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