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따위
2021년 12월 17일(금) 00:30
“언어가 아닌 것을/ 주고받으면서/ 이토록 치열할 수 있을까/ 침묵과 비명만이/ 극치의 힘이 되는/ 운동장에 가득히 쓴 눈부신 시 한 편”(문정희 시인의 ‘축구’) 엊그제 있었던 2021 FA컵 축구 결승 2차전을 보면서 이 시를 떠올렸다. 대구 FC와 전남 드래곤즈가 맞붙은 경기.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면서 손에 땀을 쥐게 했다. 대회 사상 최고의 명승부였다.

두 팀은 무려 일곱 골을 주고받았다. ‘원정 다득점’ 승리 방식이었는데, 골이 터지는 순간마다 희비가 엇갈렸다. 우승 트로피의 주인이 시시각각 바뀌기 때문이다. 후반전 추가 시간에 울린 주심의 페널티킥 휘슬은 최고 하이라이트였다. 관중들의 심장이 순간 멈췄다. 하지만 VAR 영상 확인이 이어지고, 페널티킥은 취소됐다. 이렇게 해서 전남은 FA컵 사상 첫 2부 리그 팀 우승이라는 믿을 수 없는 새 역사를 썼다.

축구에서 FA컵은 종종 기적을 만들어 낸다. 축구 역사의 아름다운 한 페이지를 장식한 이른바 ‘칼레의 기적’이 대표적이다. 2000년 프랑스 칼레의 항구노동자들로 구성된 4부 리그 팀이 리그1 팀들을 연파하고 준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국내에서도 2017년, 내셔널리그(3부 리그) 중위권 팀 목포시청이 K리그 성남FC에 완승을 거두면서 4강에 오르는 이변을 연출하기도 했다.

광주·전남 축구 팬들에게 올 시즌은 최악의 한 해라 할 수 있다. 광주FC는 K리그1에서 최하위 성적으로 2부 리그로 강등됐고, 전남 드래곤즈도 4위에 머물러 1부 리그 승격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하위 팀을 응원하는 팬들에겐 즐거움보다 고통스러운 시간이 많다. 돈과 시간을 투자해 안게 된 절망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러나 기적적인 역전승을 거두면 모든 것이 용서되기도 한다. 이번 FA컵 결승전이 바로 그런 경기였다.

축구 시즌은 끝이 났지만 코로나의 끝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이 지역에서도 오미크론 감염자가 속출하고 있다. 축구 경기가 열리면 그라운드는 90분 동안 그 무엇도 개입하지 못할 만큼 뜨겁게 달아오른다. 하지만 종료 휘슬 이후 어쩔 수 없이 돌아온 현실은 훨씬 더 가혹하고 치열하다. 축구 따위, 아무것도 아니다.

/유제관 편집1부장 jkyou@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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