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신형철 조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2021년 12월 16일(목) 00:30

신형철 조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노년의 지혜라는 것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그것이 세월에 의해 주어지는 훈장 같은 것이라 믿는다면, 그렇게 믿는 순간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지혜로부터 멀어질 것이다. 원로 현역 문학평론가 유종호 선생은 근작 ‘그 이름, 안티고네’에서 “이른바 노년의 지혜라는 것을 나는 믿지 않는다”라고 단언하는데, 젊은 날보다 나아진 것이 있다면, 타인의 행위에서 불쾌감을 느낄 때 저 사람에게는 순탄치 못한 내력이 있겠거니 하고 관용하는 태도가 생긴 것 정도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것은 고령에서 오는 관대함이나 이해가 아니라 내 본적지인 문학 분야의 독서를 통해서 얻은 바 자신을 포함한 인간에 대한 체념의 한 형식일 뿐이다.”(같은 책) 이 ‘체념’이야말로 지혜가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그조차도 노화의 자연스러운 축복이 아니라 꾸준한 문학 독서의 결과물일 뿐이라는 게 선생의 답이다.

꼰대가 되고 싶지 않다는 말로 자신이 꼰대가 아님을 증명하려는 사람이 많아져서, 이제는 꼰대가 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바로 그 사람이 꼰대라는 신랄한 역습도 있다. ‘꼰대’를 노인 혐오 표현이 되도록 방치하지 않기 위해 그것을 생물학적인 것이 아닌 정신적인 특질을 가리키는 말로 전용해야 한다. 두 유형의 인간이 있다. A는 제 성숙이 끝났다고 생각한다. 그는 낯선 것을 불편해 한다. 어차피 그것이 자신을 바꾸지 못할 것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B는 자신이 낯선 것과 만났을 때 어떻게 달라질지 늘 궁금해 한다. 그래서 그는 타인에게 관심이 많다. 자신이 모르는 인간 감정의 깊이를 공부해 보려고 동시대의 문학 작품을 펼쳐 보곤 하는 것도 대체로 그다. 이 A와 B가 노인과 젊은이에 대응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청년인 A도 있고 노년의 B도 있을 것이다.

인간의 성숙이란 결국 쉼 없는 타인 공부의 결과물이다. 거꾸로 생각하면 ‘꼰대’의 본질도 분명해진다. 꼰대란 더는 타인을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더 나아가 타인만이 나를 공부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을 준거 삼아 타인을 바꾸려 한다. 그들이 흔히 충고의 주체가 되고 싶어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저 남들보다 몇 십 년 더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에게 충고할 자격이 생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바로 그 생각 때문에 결코 누구도 바꾸지 못할 것이다. 언제나 충고는, 단지 옳은 말이기만 하면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준비가 된 사람에 의해서만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신뢰의 축적을 생략한 일방적인 충고는 상대방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되고 만다. 과격하게 말하면 자신의 만족을 위해 상대방을 청자로 착취하는 일이다.

나의 직업에 대해 말하자면, 비평가는 자기도 모르게 꼰대가 되기 가장 좋은 직종이다. 그러므로 위에서 내가 한 말을 누구보다 명심해야 할 사람도 나다. 충고할 자격은 저절로 주어지지 않는 것이어서 사전에 신뢰가 축적되어야 상대방이 충고를 받아들이듯이, 평가할 자격이라는 것도 노력해야 얻어질 수 있는 것이어서 비평가의 노력이란 결국 작품을 공들여 해석하는 일 외의 다른 것일 수가 없다. 해석이 먼저이고 평가는 나중이다. 성실한 해석이 이후의 평가를 정당화한다. 그러나 해석이라는 주중 노동을 감당할 능력도 의지도 없는 이들이 평가라는 주말의 쾌락만을 누리려고 할 때 비평은 세상에서 가장 오만하고 한심한 행위가 되고 만다. 타인을 공부한다는 말과 작품을 해석한다는 말은 같은 말이고, 꼰대가 되지 않겠다는 말과 좋은 비평가가 되겠다는 말도 같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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