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처럼 오소서!-박용수 광주동신고 교사·수필가
2021년 11월 30일(화) 02:30

박용수 광주동신고 교사·수필가

출퇴근길에 늘 만나는 노인이 있다. 폐지를 가득 싣고 수레를 끌고 가는데 여태 얼굴을 보지 못했었다. 작은 키, 굽은 허리로 무겁고 커다란 수레를 끌자니 얼굴이 땅에 닿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었다. 늘 안타까웠는데, 뜻밖에 할머니의 얼굴을 보았다. 첫눈 덕분이었다. 그날 퇴근길, 첫눈이 펑펑 내리자 그 할머니도 하던 일을 멈추고 얼굴을 들고 눈을 바라보고 계셨다. 기적 같은 순간이었다. 당신이 수레를 끄는 일이 더 수고스럽고 고단해지련만, 개의치 않고 해맑게 웃고 계셨다. 한참 할머니를 웃게 만든 것은 첫눈이었다.

곱디고운 첫눈을 바라보며 할머니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아니 무슨 소원을 빌었을까.

나도 따라 고개를 드는 순간, 4층 병원 창문으로 환자가 손을 내밀고 발랄한 표정으로 첫눈을 받고 있다. 환자의 미소가 송이송이 하얗게 내리는 것 같았다.

첫눈은 묘한 마력, 마법을 지녔다. 우선 수많은 사람을 소환하게 하는 힘이 있다. 돌아가신 아버지도, 멀리 이사 간 이웃집 경자 여동생도 데려온다. 지금 어디 사는지 모르는 병욱이 삼촌도 불러오고, 도회지로 전학을 간 석태와 그 누나도 불러온다. 잊힌 친구들도 하나둘 모두 불러낸다. 그들도 첫눈을 따라 펑펑 나에게로 온다. 첫눈의 호명에 응답하지 않는 이는 없다. 첫눈은 수많은 그리운 이의 눈동자와 함께 내리는 천 눈인 셈이다.

첫눈은 또한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들을 불러낸다. 그리고 자신의 순결한 몸으로 정화를 시켜준다. 삶의 슬픔과 고통, 쓸쓸한 것들이 눈 녹듯 녹아내린다. 나쁜 기억도 덮어 버리고, 미움도 사르르 녹여 준다. 그리고 맑게 우리 몸으로 스며들어 희망과 용기가 되고 사랑이 되어 삶의 힘으로 솟는다.

첫눈은 세상을 동화 세상으로 만들고 사람들도 순진한 아이로 만들어 버린다. 첫눈 오는 날, 거리를 걸어보면 영악한 사람들은 한 명도 없다. 온통 체면을 벗어던진 순진한 아이들로 세상은 활기차고 모처럼 살 만한, 온통 동심으로 가득 찬 세상이 된다.

첫눈은 혼자 오지 않는다. 사랑을 싣고 온다. 루돌프 사슴코가 끄는 수레 가득 선물 같은 사랑이 실려 있을 것 같다. 헤어진 사람도 만날 것 같고, 첫사랑도 만날 것 같다. 실상 삶이야 고달프지 않은 때가 없지만 그나마 사랑 때문에 살 만하지 않던가. 첫눈은 지친 사람의 어깨 위로 내리는 따뜻하고 포근한 위로이자 사랑이다. 농부는 펑펑 쏟아지는 첫눈을 보고 풍년을 기약하고, 노처녀는 결혼을, 취업 준비생는 취업을, 환자는 병원을 나가는 꿈을 꾸게 한다.

첫눈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비나 바람은 불지 않기를 바라지만 오히려 첫눈만은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린다. 첫눈은 무담시 기다려지는 애인 같은 이다.

그래서인지 첫눈은 살며시 밤에 온다. 아침에 문을 열면, 하얀 떡가루처럼 마당에 내려앉은 도둑눈을 본 적이 더 많다. 마당에도 장독대에도 담장에도 쌓인 잣눈을 보며 밤새 쿨쿨 잠만 잤던 일에 절로 낯이 붉어진다. 첫눈은 이왕 올 테면 퇴근 무렵 오는 게 좋다. 일과를 마치고 가뿐하게 맞이하고 싶은 게 첫눈이다. 모두 함께 거리로 나와 눈을 맞이하며 환호하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즐겁다.

올해 첫눈은 이왕이면 풋눈보다 소나기눈으로 오면 좋겠다. 사락사락 내려서 상처도 아물게 해주고 이웃의 아픔도 씻어 주었으면 좋겠다. 선거판으로 이쪽저쪽 갈라진 것들을 온통 하얗게 하나로 만들어 주고, 미움도 거짓도 분열도 온통 하나로 하얗게 물들였으면 좋겠다.

해마다 늘어만 가는 신종 무기들도 다 덮어 버리고, 철책선 위로 교도소 위로도 눈꽃이 하얗게 피었으면 좋겠다. 가난도 아픔도 모두 덮어 버리고 봄눈처럼 싱그럽게 왔으면 좋겠다. 신나게 눈에서 뒹구는 저 아이들이 올겨울을 지나면 부쩍 자라듯이 부디부디 사람들이 좋은 생각 좋은 마음으로 가득 찼으면 더욱 좋겠다.

첫눈이 오면 누구나 경건해진다. 첫눈을 보고 기원하면 소원이 이루어질 것 같다. 올해는 북구 장등동 망향의 공원으로 제일 먼저 달려가고 싶다. 그곳에서 뼈로나마 고향에 가고 싶은 이북 5도민의 응어리진 한이 풀어지길 기원하고 싶다. 아프고 가난한 사람들 위로 펑펑 내려 주길 소망해 본다. 그들의 슬픔이 서설에 덮여 새살이 돋아나고 포근해지길 바라 본다.

첫눈이 오면 아버지도 뵈러 가야겠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나이가 된 딱 지금, 고향 산천에 누워 계신 아버지의 마음을 껴안아 드리고 싶다.

첫눈, 첫눈이 오면 조용히 옛 추억과 함께 어느 교실에서 풍금 소리가 들려올 듯하다.

“펄펄 눈이 옵니다./ 하늘에서 눈이 옵니다./ 하늘나라 선녀님들이/ 보들보들 하얀 솜을/ 자꾸자꾸 뿌려 줍니다./ 자꾸자꾸 뿌려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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