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전두환 죽음에 부쳐-김종배 5·18 당시 시민학생투쟁위 총위원장·전 국회의원
2021년 11월 24일(수) 22:50 가가
어떤 뉘우침이나 한마디 사과도 없이 전두환이 세상을 떠났다. 광주 학살에 대한 책임과 사실 인정 없이 그냥 죽은 것이다. 화장해서 뿌려 달라는 유언을 했다니 제 잘못은 알고 있는 듯도 싶다. 그렇다고 흔적이 지워질 수 있을까?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후 12·12 군사반란을 통해 군권을 장악한 그는 민주화를 요구한 광주를 처참하게 짓밟았다. 노태우·정호용·장세동과 함께 월남전에 참전하여 베트콩 소탕 작전으로 익힌 잔인함으로 광주를 유린했다. 그는 주월 미국군 부사령관 위컴과 월남전에서 친분을 쌓기도 했는데, 1979년 위컴이 한국군 사령관으로 부임하면서 강력한 우군을 확보했다. 당시 글라이스틴 미 대사와도 소통했다. 미국을 등에 업고 광주를 짓밟았던 것이다.
전두환은 생전에 ‘광주 학살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줄곧 주장해 왔다. 광주 청문회 당시 신군부 세력들은 5·11 대책반을 만들어 청문회에 대비했었다. 5·18 당시에 그들이 기록했던 전투상보나 계엄일지를 왜곡 조작했고, 전두환의 이름 석 자가 들어가는 기록은 모두 삭제했다. 더욱이 5월 21일 금남로 집단 발포를 시민들이 먼저 무장했기 때문이었다고 기록을 위조했다. 자기들의 집단 학살이 정당방위이며 자위권 발동이라고 주장하기 위해서였다.
전두환 본인은 광주 학살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이 없다고 주장했지만 측근인 공수특전사 작전처장인 장세동을 5월 17일 광주 현장에 파견하여 수시로 보고를 받았고 정호용을 믿을 수 없어서 감시하도록 했다는 사실도 나중에 밝혀졌다. 5월 18일, 1군단 보안대장인 호남 출신 홍성률 대령을 직접 파견, 편의대를 운용케 함으로써 시위 현장을 공작했다. 독침 사건을 연출하여 마치 북한과 연결된 불순분자들이 광주 항쟁을 일으킨 것처럼 발표했다. 홍성률 대령은 군대 내에서 대공 공작의 최고 전문가로 알려져 있던 인물이었다.
5월 21일 최경조 보안사령부 수사국장을 광주 현장에 파견하여 광주 항쟁을 폭동으로 몰아가고, 김대중을 광주 항쟁의 배후로 엮어서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을 조작했다. 광주 항쟁이 격화되어 보고에 혼선이 일어나자 최예섭 보안사령부 기획처장을 광주에 급히 파견하여 전교사 사령관실에 상주하면서 수시로 전두환에게 보고하고 총괄 지휘케 하였다.
그때 광주 현지에 주재한 부대들은 유혈 진압을 반대했다. 윤흥정 전교사 사령관이 유혈 진압에 반대하자 곧바로 5월 21일 소준열로 교체했다. 황영시 계엄 부사령관이 탱크로 광주를 밀어 버리라고 지시했지만 이구호 포병학교 교장은 이를 반대하고 항명했다. 정웅 31사단장도 유혈 진압을 반대했다. 전남경찰청장인 안병하 역시 무력 진압에 반대하고 경찰을 철수시켰다.
전두환은 광주 항쟁 기간 중 한 번도 광주에 내려간 적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5월 21일 집단 발포 전에 광주를 방문하여 격려하고 올라간 사실이 밝혀졌는데, 전두환이 떠나자마자 오후 1시에 발포가 이루어졌으니 이것이 우연이었을까? 그 당시 광주 주재 505보안대 수사과장이었던 서의남은 5월 21일 오전에 광주 전교사 연병장에 전두환의 헬기가 도착하여 군 관계자들을 만나고 갔다고 증언했다. 광주 학살은 국군보안사가 기획했고 공수특전사가 실행한 사건이다.
전두환은 비겁한 사람이다. 떳떳하지 못한 사람이다. 사실 인정이나 사과 한마디 남기지 않고 떠난 후안무치한 사람이다. 정치는 잘했다고? 그는 집권 내내 강압 통치를 일삼았다. 총칼로 정권을 잡아서 통치 자금 명분으로 재벌들에게 갈취하여 사적으로 착복한 장본인이다. 2205억 원의 추징금을 부과받은 게 이를 증명한다.
아직도 광주는 그 당시 정확히 몇 명이 사망했는지 알지 못한다. 암매장 장소도 규명되지 않고 있다. 5·18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전두환은 갔어도 철저하게 진상을 규명하여 반듯한 역사를 후세에 남겨야 한다.
전두환은 생전에 ‘광주 학살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줄곧 주장해 왔다. 광주 청문회 당시 신군부 세력들은 5·11 대책반을 만들어 청문회에 대비했었다. 5·18 당시에 그들이 기록했던 전투상보나 계엄일지를 왜곡 조작했고, 전두환의 이름 석 자가 들어가는 기록은 모두 삭제했다. 더욱이 5월 21일 금남로 집단 발포를 시민들이 먼저 무장했기 때문이었다고 기록을 위조했다. 자기들의 집단 학살이 정당방위이며 자위권 발동이라고 주장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광주 현지에 주재한 부대들은 유혈 진압을 반대했다. 윤흥정 전교사 사령관이 유혈 진압에 반대하자 곧바로 5월 21일 소준열로 교체했다. 황영시 계엄 부사령관이 탱크로 광주를 밀어 버리라고 지시했지만 이구호 포병학교 교장은 이를 반대하고 항명했다. 정웅 31사단장도 유혈 진압을 반대했다. 전남경찰청장인 안병하 역시 무력 진압에 반대하고 경찰을 철수시켰다.
전두환은 광주 항쟁 기간 중 한 번도 광주에 내려간 적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5월 21일 집단 발포 전에 광주를 방문하여 격려하고 올라간 사실이 밝혀졌는데, 전두환이 떠나자마자 오후 1시에 발포가 이루어졌으니 이것이 우연이었을까? 그 당시 광주 주재 505보안대 수사과장이었던 서의남은 5월 21일 오전에 광주 전교사 연병장에 전두환의 헬기가 도착하여 군 관계자들을 만나고 갔다고 증언했다. 광주 학살은 국군보안사가 기획했고 공수특전사가 실행한 사건이다.
전두환은 비겁한 사람이다. 떳떳하지 못한 사람이다. 사실 인정이나 사과 한마디 남기지 않고 떠난 후안무치한 사람이다. 정치는 잘했다고? 그는 집권 내내 강압 통치를 일삼았다. 총칼로 정권을 잡아서 통치 자금 명분으로 재벌들에게 갈취하여 사적으로 착복한 장본인이다. 2205억 원의 추징금을 부과받은 게 이를 증명한다.
아직도 광주는 그 당시 정확히 몇 명이 사망했는지 알지 못한다. 암매장 장소도 규명되지 않고 있다. 5·18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전두환은 갔어도 철저하게 진상을 규명하여 반듯한 역사를 후세에 남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