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척간두 위에 서서-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2021년 11월 23일(화) 00:30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신종 감염증의 대유행으로 전 세계가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혼란 속에 놓여 있다. 첨단 의료기술과 보건 시스템이 2년이 다 되도록 이렇게 무기력하게 끌려 다니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과연 코로나와 함께하는 일상의 회복이 가능하기는 한 것인지 불안하고 암담한 심정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계속되는 가운데 경제적 손실은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다. 서울연구원의 정책리포트에 따르면 2020년 서울 음식점업의 매출은 전년 대비 13.6% 감소했으며, 사회적 거리 두기 시행 기간 27.6%까지 감소했다고 한다. 올해 들어 사회적 거리 두기가 더 강화되었고 코로나 2년차에 접어들면서 손실이 누적 가중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2021년의 지표는 더 심각한 수위에 이를 것이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사회 구성원 전체가 지혜를 모으고 역할을 나누어야 할 때다.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기 위해서는 리더십을 발휘하여 정책을 입안하고 효과적으로 집행하는 ‘정치’의 진정한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다. 그런데 우리 눈에 들어오는 정치판의 모습은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는 저급한 의혹과 비방들뿐이다. 내년 상반기 대통령선거와 지방선거까지 이어질 이 소모적인 정쟁의 와중에서 과연 희망이라는 것을 찾을 수 있을까? 백 척이나 되는 높다란 장대 위에 서 있는 것처럼 위태롭기 그지없는 형국이다.

“지금이 실로 어떠한 때인가? 아슬아슬하고 위태로운 형세가 이미 백척간두(百尺竿頭)와 같은 지경에 이르렀다. 바둑돌을 쌓아 올리고 계란을 포개 놓았다는 말로도 이 위태로움을 비유하기에 부족하다.” 국왕 정조가 물러난 신하를 다시 불러들이면서 내린 글의 한 부분이다. 이처럼 ‘백척간두’는 몹시 어렵고 위태로운 상황을 비유하는 성어로, 우리나라의 한문 문장에서 적지 않게 사용되어 왔다. 오늘날의 국어사전에서도 같은 의미로 설명된다.

그런데 중국과 일본에서는 ‘백척간두’를 주로 학문 혹은 사업의 성취가 지극히 높은 경지에 이르렀음을 표현하는 성어로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높은 곳이 위태롭기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나라에서만 유독 백척간두를 위태롭다는 뜻으로 많이 사용해 온 것은 흥미로운 언어 현상이다.

물론 ‘백척간두’를 높은 경지라는 의미로 사용한 예는 우리나라에서도 적지 않다. 주희(朱熹)가 진량(陳亮)·공풍(鞏豊) 등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미 학문이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백척간두에서 한 걸음 더 내딛듯이 더욱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로 사용한 데에서 영향을 받아, 지금의 학문적 성취에 안주하지 말고 더욱 분발할 것을 권면하는 맥락에서 이 말을 쓰곤 했다.

더 이상 오르지 못할 극단에 이르렀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한 걸음을 더 내디뎌야 새로운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는 가르침은 원래 불교에서 온 것이다. 주희는 이 말이 지닌 불교적 색채를 경계하면서도 학문의 진보를 드러내기에 더없이 좋은 표현이라고 생각하여 사용한 것이다.

“백척간두 위에서 움직이지 않는 사람은 경지에 오르긴 했어도 진정한 경지는 못 되네. 백척간두 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시방세계가 이 몸에 온전해지리라.” 당나라 초현대사(招賢大師)의 게송(偈頌)이다. 백척간두에서 한 걸음 나아가려면 장대에서 발을 떼어야 한다. 높디높은 백척간두 위에서 발을 떼는 행위는 그나마 나를 지탱해 주고 있는 유일한 것마저 놓아 버림을 뜻한다. 그 때 비로소 깨달음의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인간의 지식과 기술이 끝없이 진보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쌓아 올린 바벨탑의 꼭대기에서 우리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를 만나 터무니없이 무너져 내리는 위기에 봉착했다. 참으로 높고도 위태로운 백척간두다. 첨단과학기술이 고도로 발전한 21세기에 우리의 보잘것없는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제 우리가 그동안 믿고 의지해 왔던 것들을 하나하나 내려놓고 아직 가 보지 못한 허공을 향해 새로운 발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참으로 두렵고 떨리는 백척간두다. 이 백척간두 위에서 다시금 희망을 읽기 위해 우리가 내려놓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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