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영혼의 무늬
2021년 11월 02일(화) 02:30
박용수 광주동신고 교사·수필가
여행 목적지는 언제나 고민이다. 누구나 멋진 여행을 하고자 한다. 그래서 여행은 장소 모색부터 행복한 고민에 빠진다. 유명한 곳은 너무 많이 알려져서 새로운 것이 없고, 생소한 곳은 볼 것도 아는 것도 없어서 실망하는 경우가 많다. 구경도 하고 재미있게 놀 수 있는 적당한 곳을 물색하는 일은 쉽지 않다.

여행할 때는 풍광을 보러 갈 것인지 아니면 먹거나 쉴 것인지를 먼저 결정하는 편이다. 월출산이나 두륜산도 좋고 완도 명사십리나 순천 갈대밭도 좋다. 고흥 어느 포구에 앉아 시 한 편을 써도 좋고, 벌교에서 꼬막을 안주 삼아 염상구의 질펀한 삶 속을 들여다보아도 좋다.

사막이나 히말라야처럼 대체로 자연이 너무 승하면 사람이 들어설 틈이 없고, 사람이 승하면 대도시처럼 자연 색깔이 옅다. 이왕이면 자연과 인간, 두 가지가 잘 어우러지는 섬마을이나 작은 읍내가 맞춤이다. 그런 곳은 사람이 자연을 거스르지도 않고 자연이 사람을 밀어내지도 않는다. 돌담이나 나무 한 그루, 고랑 하나도 자연이 만들고 사람이 길을 낸, 사람의 손길과 비바람 눈보라가 오랜 시간 합작으로 만든 곳이다.

사람이 자연을 선택하기도 하지만 좋은 자연은 사람을 끌어들인다. 창평의 고샅은 물과 사람을 불러들이고, 화순 도암의 달개 꽃개 구름개라는 지명은 이름부터 곱다. 자연도 주인이고 인간도 주인인 곳, 영산강은 사람을 순하게 만들고, 섬진강은 맑게 한다. 푸른 하늘은 영혼을 맑게 하고 맑은 햇살은 또 나그네의 발길을 따뜻하게 한다.

그러나 여행의 진짜 목적지는 사람이다. 설악산이나 순천만 경치는 한계가 있다. 풍경을 완성하는 것은 사람이다. 아무리 빼어난 경치라도 인간을 끼워 넣지 못하면 흑백 사진처럼 파편화된 조각이고 인간과 조화를 이룰 때만 한 폭 그림으로 완성된다. 그래서 인간의 삶을 관찰하다 보면 지치는 법이 없고 나아가 경탄과 경외에 이르기까지 한다. 좋은 여행은 몸만 옮기는 것이 아니라 자아를 이동시켜 사유하게 한다. 우리가 여행하며 해독하고자 하는 본질은 우리의 삶이고, 그 여행 과정에서 걷고 또 걸으면서 결국 찾고자 하는 보물이 나라는 본질적 자아가 아니던가.

여행은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며 자신을 위로하고 고양시킬 때 빛난다. 꼭 멋진 곳만을 택할 필요는 없다. 무심코 딛고 지나간 길섶의 꽃 하나도 여순 사건으로, 4·3으로 억울하게 죽어간 이의 울분이 핀지 모르고, 붉은 노을은 누군가 흘린 피일 수 있으며, 철썩이는 파도 소리는 또 누군가의 울음소리인지도 모른다.

여행하다 보면 산이 산과 이어져 함께 있고, 물과 물이 뒤섞여 하나로 흘러가듯 놀랍게도 시간적 공간적으로 수만 킬로 떨어진 그들과 내가 강물처럼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꽃잎 하나하나가 모여 꽃 한 송이를 이루고, 나무 하나둘이 모여 숲을 이루듯 농민과 노동자나 외국인 근로자들 그들이 결코 타자가 아닌 나라는 사실도 깨닫는다. 그들의 수고로움에 감사하고 그들의 노고에 손을 흔들어 화답할 수 있는 마음을 갖기도 한다.

흔히 인생을 여행이라고들 한다. 인생이 여행이라면 여행은 종국에 되돌아옴이다. 그 마디마디에 감탄사를 넣기도 하고 쉼표와 느낌표를 찍는다. 그게 없으면 온전한 여행이 아니다. 그러니 좋은 여행이라면 돌아왔을 때, 아쉬움이 남거나 피곤하기보다 설렘이 증폭되어 내일의 더 큰 에너지가 된다.

여행하고 돌아오면 사진만 남는다고 한다. 그러나 찍거나 찍힌 수많은 껍데기보다도 실은 우리 마음에 인간의 무늬, 삶의 무늬 몇 개는 새기거나 새겨져 있어야 한다. 그것은 어떤 필름으로도 찍을 수 없고, 모방할 수 없는 관계의 무늬, 깨달음의 무늬, 영혼의 무늬이다. 다리도 아프고 배도 고프지만, 영혼은 더욱 풍성해지고 행복해지는 무늬 말이다.

실상 내 삶터가 가장 빛나는 여행지이다. 영혼에 아름다운 무늬를 새길 수 있는 가까운 곳으로, 마음을 열고 사람을 찾아 영혼 여행을 나서 보자. 하남이나 본촌 공단, 남광주나 말바우 시장, 진도 바다, 망월동 민주 묘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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