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 장군과 강항 선생의 우정-강대석 시인
2021년 10월 13일(수) 06:00 가가
장성 입암산성(笠巖山城)을 오르다 보면 갓바위 가는 길에 ‘윤진 장군 순의비’가 있다. 윤진(1548~1597) 장군은 임진왜란 때 장성에서 김경수를 맹주로 한 남문 창의에 참여하여 종사로 활약하였으며 이후 왜적이 전라도로 침입하여 올 것에 대비하여 입암산성의 수축을 건의하고 산성을 정비하여 정유재란 때 산성을 지키다 순절한 무신이다.
1597년 8월 왜적이 남원성을 짓밟고 남으로 내려오자 윤진은 전라도의 관문인 입암산성을 지키기 위해 백여 명의 의병을 모았으나 왜적이 눈앞에 들이닥치자 병사들은 겁에 질려 모두 도망치고 관리들도 피신하기에 바빴다.
윤진의 친구들은 “자네는 성을 쌓으라는 명을 받았을 뿐, 성을 지키라는 명은 받지 않았는데 왜 피난을 가지 않는가?”라며 빨리 피신토록 종용했다. 그러자 윤진은 “조정이 이 성을 쌓을 때는 오늘을 대비하기 위함인데 신하된 도리로서 어찌 목숨을 위한단 말인가? 이 성은 내가 죽을 땅이요, 오늘은 내가 죽을 날이다”라며 몇 안 되는 의병들과 성을 지키다 중과부적으로 장렬히 순절했다. 윤진의 아내 권씨 부인은 남편이 전사했다는 말을 듣자 적에게 몸을 더럽힐 수 없다며 패도를 꺼내 자결하니 적들도 이를 의롭게 여겨 아무도 건드리지 않고 떠났다. 그의 아들 윤운구 역시 당시 17세였으나 아버지를 도와 싸우다 적의 칼에 찔려 절벽 밑으로 떨어지는 바람에 겨우 목숨은 건졌다. 권씨 부인은 당대 유명한 시인인 권필(1579~1612)의 누님이었다. 권필은 조카 윤운구와 함께 윤진의 시신을 열흘 만에 수풀 속에서 찾아내어 겨우 장사를 지냈다.
윤진과 영광의 수은 강항(1567~1618)은 친한 벗이었다. 나이는 열아홉 살 차이였지만 망년교(忘年交)를 하며 지냈다. 망년교란 나이를 초월하여 벗으로 사귀는 것이다. 강항은 윤진의 처남인 권필과도 친구였다. 둘의 만남은 공무로 진원현을 지나던 강항이 인근 마을에 권필이 와있다는 소문을 듣고 빗속에 찾아가면서 시작되었다. 처음 만난 날 하룻밤을 시주(詩酒)로 세우며 둘은 절친이 되었다.
그리고 몇 년 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윤진은 입암산성을 지키다 순절했고 강항은 남원성 전투에서 군량미를 운송 중 성이 함락되자 이순신 장군 휘하로 가려다 왜적에게 붙잡혀 일본으로 끌려갔다. 두 사람의 운명이 정유재란으로 인해 생사가 갈린 것이다.
강항이 3년간의 포로 생활을 마치고 기적적으로 생환하자 권필은 누구보다 기뻐하며 영광 불갑까지 찾아가서 위로했다. 강항은 권필에게서 윤진의 순절 소식을 듣고 그의 아들 윤운구를 문하에 받아들였다. 윤운구는 강항의 문하에서 7년 동안 숙식을 하며 공부하여 진사시에 합격했다. 강항과 윤운구는 열세 살 차이였다. 강항은 제자인 윤운구에게 망년교를 권하며 윤진이 자신을 대한 것처럼 벗으로 대했다. 윤진에게서 받은 망년교의 정을 그의 아들인 윤운구에게 그대로 베푼 것이다. 대를 잇는 아름다운 우정이었다.
강항은 윤진이 나라를 위해 싸우다 목숨을 바쳤음에도 공훈을 받지 못함을 딱하게 여겨 윤진의 포상을 건의하는 청포윤진소(請褒尹鎭訴)를 장성 유림을 대신해서 조정에 올리고 뒤이어 윤진의 행장(行狀)도 지어 주었다. 행장에서 강항은 “공이 살았을 때에는 나에게 망년교를 하였는데 이제 공의 아들 운구에게 내가 또 망년교를 하고 있으니 선생의 일생을 나만큼 아는 사람은 없다”라고 했다. 두 사람의 우정의 깊이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권필은 궁류시(宮柳詩)로 유명했다. 광해군의 처남 유희분이 궁궐 내에서 온갖 세도를 부리자 이를 빗대 지은 시가 궁류시다. 결국 권필은 이 시로 광해군의 노여움을 사서 해남으로 귀양을 가게 되며 귀양길에 동대문 앞에서 행인들이 동정으로 권하는 술을 모두 받아 마시고 술병이 나서 새벽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아까운 천재 시인의 최후였다.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잠시 시간을 내서 주변의 문화유적을 찾아 옛 선비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는 것도 이 가을을 무심찮게 보내는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윤진의 친구들은 “자네는 성을 쌓으라는 명을 받았을 뿐, 성을 지키라는 명은 받지 않았는데 왜 피난을 가지 않는가?”라며 빨리 피신토록 종용했다. 그러자 윤진은 “조정이 이 성을 쌓을 때는 오늘을 대비하기 위함인데 신하된 도리로서 어찌 목숨을 위한단 말인가? 이 성은 내가 죽을 땅이요, 오늘은 내가 죽을 날이다”라며 몇 안 되는 의병들과 성을 지키다 중과부적으로 장렬히 순절했다. 윤진의 아내 권씨 부인은 남편이 전사했다는 말을 듣자 적에게 몸을 더럽힐 수 없다며 패도를 꺼내 자결하니 적들도 이를 의롭게 여겨 아무도 건드리지 않고 떠났다. 그의 아들 윤운구 역시 당시 17세였으나 아버지를 도와 싸우다 적의 칼에 찔려 절벽 밑으로 떨어지는 바람에 겨우 목숨은 건졌다. 권씨 부인은 당대 유명한 시인인 권필(1579~1612)의 누님이었다. 권필은 조카 윤운구와 함께 윤진의 시신을 열흘 만에 수풀 속에서 찾아내어 겨우 장사를 지냈다.
그리고 몇 년 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윤진은 입암산성을 지키다 순절했고 강항은 남원성 전투에서 군량미를 운송 중 성이 함락되자 이순신 장군 휘하로 가려다 왜적에게 붙잡혀 일본으로 끌려갔다. 두 사람의 운명이 정유재란으로 인해 생사가 갈린 것이다.
강항이 3년간의 포로 생활을 마치고 기적적으로 생환하자 권필은 누구보다 기뻐하며 영광 불갑까지 찾아가서 위로했다. 강항은 권필에게서 윤진의 순절 소식을 듣고 그의 아들 윤운구를 문하에 받아들였다. 윤운구는 강항의 문하에서 7년 동안 숙식을 하며 공부하여 진사시에 합격했다. 강항과 윤운구는 열세 살 차이였다. 강항은 제자인 윤운구에게 망년교를 권하며 윤진이 자신을 대한 것처럼 벗으로 대했다. 윤진에게서 받은 망년교의 정을 그의 아들인 윤운구에게 그대로 베푼 것이다. 대를 잇는 아름다운 우정이었다.
강항은 윤진이 나라를 위해 싸우다 목숨을 바쳤음에도 공훈을 받지 못함을 딱하게 여겨 윤진의 포상을 건의하는 청포윤진소(請褒尹鎭訴)를 장성 유림을 대신해서 조정에 올리고 뒤이어 윤진의 행장(行狀)도 지어 주었다. 행장에서 강항은 “공이 살았을 때에는 나에게 망년교를 하였는데 이제 공의 아들 운구에게 내가 또 망년교를 하고 있으니 선생의 일생을 나만큼 아는 사람은 없다”라고 했다. 두 사람의 우정의 깊이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권필은 궁류시(宮柳詩)로 유명했다. 광해군의 처남 유희분이 궁궐 내에서 온갖 세도를 부리자 이를 빗대 지은 시가 궁류시다. 결국 권필은 이 시로 광해군의 노여움을 사서 해남으로 귀양을 가게 되며 귀양길에 동대문 앞에서 행인들이 동정으로 권하는 술을 모두 받아 마시고 술병이 나서 새벽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아까운 천재 시인의 최후였다.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잠시 시간을 내서 주변의 문화유적을 찾아 옛 선비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는 것도 이 가을을 무심찮게 보내는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