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무형문화재’ 박시양 “소리 빈자리 메우는 ‘고법’ 널리 알리고 전승하는데 힘쓸 것”
2021년 08월 26일(목) 00:00 가가
국가무형문화재 ‘판소리 고법’ 보유자
함평 출신… 문화재 김성래 사사
광주시립국악관현악단 등서 활동
삶·언어·음악 연관 도서 출간 계획
함평 출신… 문화재 김성래 사사
광주시립국악관현악단 등서 활동
삶·언어·음악 연관 도서 출간 계획
소리를 하는 명창 옆에는 늘 북을 치는 고수가 함께한다. 바늘과 실처럼 뗄 수 없는 관계다. 39년간 북과 한 몸이 돼 북채를 손에서 놓지 않은 사람이 있다. 바로 박시양(59)씨다. 최근 그가 국가무형문화재 판소리 고법 보유자가 됐다는 소식을 알려왔다. 정철호·김청만 씨에 이은 세번째 보유자다. 함평 출신인 그는 대학 동아리에서 처음 국악을 접했다. 집안 역시 국악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 점에서 이번 보유자 인정은 박 씨의 오랜 노력이 이뤄낸 결실이라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고법은 북 치는 방법을 의미해요. 판소리 고법은 소리에 따라 추임새로 흥을 돋우고, 북으로 소리의 빈자리를 메우며 자연스럽게 소리꾼의 소리가 연결되도록 하는 역할을 하죠. 평생 이 일을 해왔지만 어렸을 적부터 꿈꿔온 일은 아니예요.”
1981년 전남대 농대에 입학한 그는 국악반 동아리에 들어가면서 판소리를 처음 접했다. 박 씨는 “어렸을 적 텔레비전에 판소리 명창 안숙선 등이 나와 소리를 하면 채널을 돌렸다”며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심청전’, ‘춘향전’ 등을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부르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대학에 진학한 후 어느 날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때 왜 우리 소리를 듣지않고, 보지않고 채널을 돌렸을까’.
“판소리를 글로 엮은 가사가 너무 어려워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어요. 작품을 듣고 이해할만큼만 공부를 해봐야겠다고 마음먹었죠. 그게 시작이었어요.”
박 씨는 판소리를 배울 수 있는 곳을 찾던 중 국악반 동아리를 알게 됐고 판소리를 배우기 시작했지만 그땐 주로 선배들과 술을 마시며 노는데 집중했다. 또 시위를 하러 나섰다가 구속됐고 1984년 초 사면·복권되면서 재입학해 다시 동아리 활동을 시작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던 중 동아리 선배였던 중요무형문화재 제 5호 판소리 고법 이수자 김동현이 후배들이 공연할 때 북을 치며 반주를 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했고 처음 고수로 무대에 섰다.
“제가 원래 산만한 사람이예요. 집중력이라고는 없는 사람이죠. 그런데 어느 날부터 화장실 가는 시간, 밥먹는 시간, 술먹는 시간을 빼고는 북을 계속 치게 되더라고요. 그때 지금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재능을 발견했다는 착각을 했어요.”(웃음)
그렇게 열심히 또 꾸준히 북을 치니 김동현이 평생 직업으로 삼지 않겠냐고 물어왔다. 박 씨는 “최고의 재능을 가진 어른 몇 분을 제외하고는 국악하면 다들 굶는 상황이었다. 돈벌이는 불가능했다”며 “나는 결혼도 안해서 먹여살릴 식구도 없었고, 거리낄 만한 일이 없었기 때문에 해보자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이후 1989년 전남도립국악단 단원모집에 지원하면서 청암 김성래를 만났다. 그 당시 문화재로 지정된 김성래는 박 씨에게 후계자가 되어달라고 했고 그렇게 그는 고법을 더 깊이, 평생 공부하게 됐다. 힘든 순간도 있었다. 김성래에게 가르침을 받으면서 9년간 슬럼프를 겪은 것이다. 아무리 연습해도 실력이 늘지 않아 한계인가 싶었다는 것이다.
“어느 순간 ‘아!’하는 순간이 오더니 모든게 해결됐어요. 북 치는 일이 열심히 한다고 해서 조금씩 실력이 느는게 아니더라고요. 열심히 해서 실력이 는다면 중간에 그만 두는 사람이 없겠죠. 하지만 그만두지 않고 꾸준히 하니 어느 순간 실력이 한단계 성장하는 순간이 와요. 소리와 북이 어떻게 묶여야 객석에 완벽하게 전달되는지 그동안 힘들었던 부분이 한꺼번에 풀렸습니다.”
1995년부터는 광주시립국악관현악단원으로서 왕성한 연주활동을 펼쳤고 2001년 국가무형문화재 판소리(고법) 전승교육사로 인정받아 고법 전승에 힘썼다. 그러던 중 일을 그만두고 고향 함평으로 발길을 돌렸다. 먹고살기 위한 돈을 벌기 위해 레슨을 하기보다 좀 더 근본적인 교육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는 함평의 폐교를 새롭게 꾸며 광주·전남지역의 학교와 연계해 학생들에 우리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지만 운영은 쉽지 않았다.
“무엇이든 어렸을 적 한번 본 것은 평생 잊지 않아요. 그래서 2014년 4월 문을 열었는데 그 해 세월호 사건이 터졌어요. 학생들의 이동이 제한돼 그 한 해는 버렸고, 이듬해 다시 열심히 해보자 하고 14개 학교와 계약을 했는데 메르스가 덮쳤죠. 2016년에는 폐교를 소유하고 있는 함평군 측에서 서울시 사업을 하겠다고 폐교를 비우라고 하더군요.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습니다.”
그는 문화재가 된 만큼 판소리 고법을 더욱 널리 알리고 전승하는데 힘쓰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문화재로 지정된 이유는 ‘고법을 전승하라’는데 있다고 생각하는 그는 기술보다 고법의 전통과 근본 그리고 인간적 규범을 강조하고 싶다.
또 지금까지 무대에 서면서 느꼈던 것을 책으로 엮을 생각이다. 단순히 북과 관련한 기술을 나열하는 것이 아닌 우리의 삶과 언어를 판소리 고법과 연관지어 이야기하고 싶다는 것이다.
“기술은 어깨 너머로 한번 보고 귀로 들으면 따로 가르쳐 주지 않아도 누구나 할 수 있는 거예요. 기술을 보통 가락이라고 하는데 중요한 것은 내가 공부해 온 가락을 판소리의 어떤 부분에서 쓸지, 소리꾼이 무슨 소리를 낼 때 쓸지 아는 것입니다. 아울러 세상에 도덕적으로 헤이해진 요즘, 단순히 기술을 가르쳐 돈을 벌기 보다는 음악인으로서 사회 전반의 도덕성이 살아나도록 확립하는데 일조하고 싶습니다.”
/전은재 기자 ej6621@kwangju.co.kr
“판소리를 글로 엮은 가사가 너무 어려워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어요. 작품을 듣고 이해할만큼만 공부를 해봐야겠다고 마음먹었죠. 그게 시작이었어요.”
박 씨는 판소리를 배울 수 있는 곳을 찾던 중 국악반 동아리를 알게 됐고 판소리를 배우기 시작했지만 그땐 주로 선배들과 술을 마시며 노는데 집중했다. 또 시위를 하러 나섰다가 구속됐고 1984년 초 사면·복권되면서 재입학해 다시 동아리 활동을 시작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던 중 동아리 선배였던 중요무형문화재 제 5호 판소리 고법 이수자 김동현이 후배들이 공연할 때 북을 치며 반주를 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했고 처음 고수로 무대에 섰다.
“제가 원래 산만한 사람이예요. 집중력이라고는 없는 사람이죠. 그런데 어느 날부터 화장실 가는 시간, 밥먹는 시간, 술먹는 시간을 빼고는 북을 계속 치게 되더라고요. 그때 지금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재능을 발견했다는 착각을 했어요.”(웃음)
그렇게 열심히 또 꾸준히 북을 치니 김동현이 평생 직업으로 삼지 않겠냐고 물어왔다. 박 씨는 “최고의 재능을 가진 어른 몇 분을 제외하고는 국악하면 다들 굶는 상황이었다. 돈벌이는 불가능했다”며 “나는 결혼도 안해서 먹여살릴 식구도 없었고, 거리낄 만한 일이 없었기 때문에 해보자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이후 1989년 전남도립국악단 단원모집에 지원하면서 청암 김성래를 만났다. 그 당시 문화재로 지정된 김성래는 박 씨에게 후계자가 되어달라고 했고 그렇게 그는 고법을 더 깊이, 평생 공부하게 됐다. 힘든 순간도 있었다. 김성래에게 가르침을 받으면서 9년간 슬럼프를 겪은 것이다. 아무리 연습해도 실력이 늘지 않아 한계인가 싶었다는 것이다.
“어느 순간 ‘아!’하는 순간이 오더니 모든게 해결됐어요. 북 치는 일이 열심히 한다고 해서 조금씩 실력이 느는게 아니더라고요. 열심히 해서 실력이 는다면 중간에 그만 두는 사람이 없겠죠. 하지만 그만두지 않고 꾸준히 하니 어느 순간 실력이 한단계 성장하는 순간이 와요. 소리와 북이 어떻게 묶여야 객석에 완벽하게 전달되는지 그동안 힘들었던 부분이 한꺼번에 풀렸습니다.”
1995년부터는 광주시립국악관현악단원으로서 왕성한 연주활동을 펼쳤고 2001년 국가무형문화재 판소리(고법) 전승교육사로 인정받아 고법 전승에 힘썼다. 그러던 중 일을 그만두고 고향 함평으로 발길을 돌렸다. 먹고살기 위한 돈을 벌기 위해 레슨을 하기보다 좀 더 근본적인 교육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는 함평의 폐교를 새롭게 꾸며 광주·전남지역의 학교와 연계해 학생들에 우리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지만 운영은 쉽지 않았다.
“무엇이든 어렸을 적 한번 본 것은 평생 잊지 않아요. 그래서 2014년 4월 문을 열었는데 그 해 세월호 사건이 터졌어요. 학생들의 이동이 제한돼 그 한 해는 버렸고, 이듬해 다시 열심히 해보자 하고 14개 학교와 계약을 했는데 메르스가 덮쳤죠. 2016년에는 폐교를 소유하고 있는 함평군 측에서 서울시 사업을 하겠다고 폐교를 비우라고 하더군요.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습니다.”
그는 문화재가 된 만큼 판소리 고법을 더욱 널리 알리고 전승하는데 힘쓰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문화재로 지정된 이유는 ‘고법을 전승하라’는데 있다고 생각하는 그는 기술보다 고법의 전통과 근본 그리고 인간적 규범을 강조하고 싶다.
또 지금까지 무대에 서면서 느꼈던 것을 책으로 엮을 생각이다. 단순히 북과 관련한 기술을 나열하는 것이 아닌 우리의 삶과 언어를 판소리 고법과 연관지어 이야기하고 싶다는 것이다.
“기술은 어깨 너머로 한번 보고 귀로 들으면 따로 가르쳐 주지 않아도 누구나 할 수 있는 거예요. 기술을 보통 가락이라고 하는데 중요한 것은 내가 공부해 온 가락을 판소리의 어떤 부분에서 쓸지, 소리꾼이 무슨 소리를 낼 때 쓸지 아는 것입니다. 아울러 세상에 도덕적으로 헤이해진 요즘, 단순히 기술을 가르쳐 돈을 벌기 보다는 음악인으로서 사회 전반의 도덕성이 살아나도록 확립하는데 일조하고 싶습니다.”
/전은재 기자 ej6621@kwangju.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