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참 휴식 없어라-중 현 광주 증심사 주지
2021년 08월 20일(금) 05:00
2021년 8월 12일. 폭염에 온 세상이 녹아 내리던 오후, 오랜만에 자투리 시간이 생겼다. 이런 때에 제대로 쉬어야 하지만, 쉰다고 절에 있어 봐야 마땅히 할 것도 없을뿐더러 딱히 갈 곳도 없다. 절이 생활 공간이자 직장이자 수행처이기도 한 개인적 특수성 탓에 일이 없는 날이 쉬는 날이요 휴가다 보니 정작 시간이 나면 어떻게 쉬어야 할지 막막할 따름이다. 도대체 휴식이란 것이 무엇인지 막연하기만 하다.

점심을 먹고 아무 일 없이 멍하니 있자니, 심심한 건지 외로운 건지 분간하기 힘든 묘한 느낌이 무의식의 심연을 뚫고 올라온다. 불청객이지만 이제는 익숙해진 감정이다. 혼자서 오래 살다 보면 외로움과 심심함이 흐물흐물 녹아서 서로 뒤엉키는 특이점의 순간이 찾아온다. 인간적 결핍이 주는 고통에는 점점 더 무디어지는 대신, 말초적 심심함에는 갈수록 예민해지면서 나타나는 결과이다.

밤이 되어 무료함을 달랠 요량으로 페이스북에 들어갔더니 친절하게도 4년 전 오늘의 내가 나를 맞이한다. 2017년 8월 12일, 나는 오늘과 꼭 같이 휴식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참으로 기막힌 우연이다. 4년이란 긴 세월이 가위에 싹둑 잘려나간 것처럼, 두개의 8월 12일은 종이 한 장의 빈틈도 없이 이어져 있었다. 4년 전 8월 12일, 나는 일본 홋가이도로 떠났던 4박 5일간의 여행을 마치고 막 돌아온 참이었다. 당시 나는 여행의 기억을 이렇게 기록했다.

이른 아침의 옥상 노천탕엔 나 혼자 밖에 없었다. 노천욕탕은 거울처럼 잔잔했다. 눈앞에 펼쳐진 호수 역시 고요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노천탕의 물이 살짝 넘치고 있어서 마치 욕탕의 경계가 없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어깨까지 몸을 담그니 어디까지가 노천탕이고 어디부터가 호수인지 도무지 분간할 수 없었다. 노천탕과 호수의 수면은 자연스럽게 이어져 하나가 되었다. 호수 전체가 아주 커다란 노천탕이 되었다. 나는 따뜻하면서도 까마득하게 넓은 호수에 몸을 담그고 있는 듯한 기분에 빠져 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아무 생각 없이 잔잔한 수면, 하늘을 가득 채우며 낮게 드리운 구름, 그리고 구름에 몸을 숨긴 산들을 응시하였다. 눈앞의 세상은 참으로 단순했다. 물, 구름, 산 그리고 흐린 하늘이 전부였다. 흐린 날씨 탓에 물빛과 구름은 짙은 회색빛이었고, 아직 이른 아침이라 산 역시 짙은 그늘 속에 있었다.

나는 미동조차 하질 않았다. 한동안 그렇게 있자니, 이 순간 이전까지의 나의 삶이 너무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나의 존재감이 사라졌다. 잠시나마 나는 완벽하게 나의 삶, 인간 세상 그리고 문명으로부터 도피하였다. 지금까지의 나로부터 철저하게 벗어난 것이다. 그리고 깨달았다. 인간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그 자체가 스트레스라는 것을. 진정한 휴식이란 바로 문명이 주는 스트레스에서 벗어나는 것임을.

옥상 노천탕에서 겪었던 그 느낌은 이상하게도 지워지지 않고 마음 한 구석에 또렷하게 각인되었다. 그 순간 이후로도 나는 하늘을 보고, 산을 보고, 나무를 보지만 그때의 하늘, 그때의 산이 아니다. 그날 이후로 그날의 느낌은 일상을 반조하는 거울이 되었다. 그 순간 이전까지의 나는 제대로 된 거울도 없이 자신을 보려는 부질없는 노력을 해 왔던 것만 같다.

4년 전의 기록을 보는 순간, 방금 전 일인 듯 느낌 하나 하나가 생생하게 복원되었다. 참으로 신기하다. 지난 4년 동안 그날의 느낌을 까마득히 잊고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날의 느낌을 다시 접하자마자 나의 의식 속 4년은 연기처럼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사실 무료함을 견디지 못한 나는 오후 늦게 영광 백수해안도로를 드라이브하고 돌아왔다. 60킬로미터나 멀리 떨어진 바다를 향해 달려서, 백수해안도로의 갈매기가 되었다. 그리고 전망대 난간에 앉아 일말의 감정도 내비치지 않는 동그란 눈을 크게 뜨고서,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4년 전의 기억은 여전히 무의식 깊은 곳에서 나를 조종하고 있었다.

제대로 된 휴식은 내 영혼을 꽁꽁 감싸고 있는 모든 인간적인 것들을 뚫고, 내 안의 자연을 만나는 원초적 체험이다. 그래서 제대로 쉬기가 이리도 힘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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