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이다-고성혁 시인
2021년 06월 30일(수) 03:00

고성혁 시인

절망과 희망 사이에는 ‘포기’가 있다. 포기를 통해야만 희망에 이를 수 있으니 그것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포기해야 생의 봉우리에 도달할 수 있는 삶의 절절한 법칙. 그런 까닭에 내미는 모든 손을 잡을 수는 없다.

어미 닭이 제가 깬 새끼들을 쫓고 있다. 어제 오후 새끼들을 피해 횃대로 올라가더니만 오늘 아침부터는 아예 부리를 들이대며 제 새끼들을 쫀다. 정을 떼는 게 분명하지만 먼발치서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아프다. 얼마나 지났을까. 병아리들이 포기한 듯 구석으로 물러나 어미를 보며 옹송그리고 있다. 녀석들아, 너흰 알을 깨고 나왔잖니. 또 다시 알을 깨야 해. 그래야 또 다른 세상으로 가는 길이 열리는 거야.

녀석들의 어미는 암탉 중 가장 약한 놈이었다. 모이를 주면 다투기는커녕 도망가기 바빴고 겁이 많은 까닭에 이상한 기미만 있어도 제풀에 놀라 풀쩍 날아오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늘로 솟구쳤다. 한 번의 도약으로 2.5미터를 날아 닭장 지붕에 꼿꼿이 서 하늘을 우러르고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신기했다. 녀석에게도 신세계였을 것이다. 녀석은 멀거니 쳐다보는 나를 힐끗 보더니 대숲으로 날았다. 녀석을 찾아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숲과 닭장을 기웃거렸다. 종적이 묘연했다. 하지만 녀석은 그런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저녁나절 닭장 안으로 내려앉았다. 그 일은 매일 반복됐다. 녀석은 도대체 무얼 하고 다니는 걸까. 그러기를 한 달여. 어느 날부터 녀석이 귀가하지 않았다. 우리는 이 잡듯 숲속을 뒤졌다. 산 그림자가 드리운 해거름, 나무 밑 구석진 곳에서 아내의 탄성 소리가 들렸다.

아, 찾았네, 빨리 와 봐.

산짐승이 출몰하는 산기슭, 커다란 참나무 아래 녀석이 웅크리고 있었다. 웅크린 바닥은 경사진데다 울퉁불퉁했다. 펼친 날개로도 다 덮지 못한 알이 살짝 비어져 보였다. 아래 풀숲에는 몇 개의 알들이 흩어져 있었다. 흘러내린 것들을 포기한 채 남은 알들을 품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전율이 일었다. 녀석이 마침내 알을 품은 것이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녀석을 경외의 마음으로 바라봤다. 둥지 위에 패널을 덮어 은폐했다. 비바람 때문에 비닐도 덮었다. 물과 모이를 녀석의 발밑에 두고 매일 동태를 살폈다. 녀석은 화답이라도 하듯 꼼짝 않고 알들을 품었다. 그러던 어느 아침 숲속에서 병아리 세 마리가 무지개처럼 나타난 것이다. 가슴이 뭉클해 탄성이 절로 나왔다. 풀숲을 헤치며 날갯짓을 하는 병아리들. 앙증맞은 그 모습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닭장 안으로 옮겨놓은 뒤에는 병아리 근처에 그림자만 스쳐도 깃털을 세우며 덤벼드는 어미닭을 보며, 어린 시절 공사장 벽돌을 이어 나르며 우리를 키우신 어머니의 고무 대야를 떠올렸다. 그 순정한 모성애 때문이었을 것이다. 병아리들은 하루가 다르게 자랐다. 그동안 우린 정말 행복했다.

20일이 지나자 병아리들 몸집이 주먹만 하게 커지더니 이내 꽁지가 도드라졌고 꼬리 깃을 세우려는 듯 끝 모양도 부풀어 올랐다. 그것이 표식이었을까. 어미가 제 새끼들을 쪼기 시작한 것이다. 병아리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도망가다 몇 번이고 되돌아서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완전하게 정을 떼려는지 어미는 가까이 오는 새끼들을 더욱 세게 쪼았다. 녀석들은 결국 컴컴한 구석으로 피했고 어미는 틈을 타 닭장 밖으로 나가버렸다. 한동안 저희끼리 모여 힘없이 재재거리는 병아리들. 얼마 후 잊어야 한다는 듯 땅을 헤적이기 시작했다. 안타까움으로 가슴이 찡했지만 한편으로는 안도했다. 포기는 희망으로 건네는 징검다리니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성이 있어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우월하다고 했지만 탐욕을 가진 유일한 생명체라는 점에서 인간은 가장 하등한 생물체임이 분명하다. 알을 쪼아 새끼들을 깨낸 뒤 다시 생이별의 방식으로 생존의 원칙을 전하는 어미 닭의 진실을 보면서 배려와 절제 대신 탐욕으로 지리멸렬의 병든 지구를 물려주는 인간을 생각한다. 인간의 문명이란 실은 욕망이 빚은 유리 허상이 아닐까. 병아리들이 몰려다닌다. 이제 두려움을 잊은 듯싶다. 이리 생각만 많은 내가 저 병아리만도 못한 것 같아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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