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방문과 통닭 - 송민석 수필가·전 여천고 교장
2021년 06월 15일(화) 21:30 가가
초임 교사의 4월은 늘 고행의 달이었다. 담임의 역할 중 가장 힘든 것이 가정방문이 아닌가 싶다. 도회지에서야 교육열이 강한 학부모가 알아서 챙길 수 있다. 시쳇말로 ‘어머니의 정보력, 아버지의 무관심, 할아버지의 재력’이란 말이 유행한 적이 있지 않은가. 그러나 농촌은 다르다. 어려운 가정형편에다 학부모의 낮은 학력 수준과 무관심 속에 방치되기 쉬운 시골일수록 가정방문은 꼭 필요한 담임의 업무 중 하나일 것이다.
학생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고자 읍 단위 고등학교에 첫 발령을 받은 후 시작한 가정방문이었다. 학교가 안정되는 3월 중순부터 우리 반 가정방문이 시작된다. 이 기간에는 신들린 사람처럼 토요일, 일요일에도 매일 학생을 찾아 나섰다. 그래야만 4월이 끝날 무렵이면 60여 명의 가정방문을 마칠 수 있어서였다.
특히 농촌의 4월은 농번기의 시작이다. 학부모가 일 나가고 빈집이 더 많아서 우선 학생의 공부방부터 살피는 게 순서다. 일요일 시골길에 식당은커녕 가게도 없어서 점심을 놓치고 거르기 일쑤였다. 70년대는 자동차도 흔치 않던 시절이었다. 일요일 종일 먼지를 뒤집어쓰면서 고난의 행군과 같은 4월이 지나고 나면 학생들이 한눈에 쏙 들어왔다.
신출내기 교사 시절 남자 고교에 근무할 때였다. 토요일 오후 학생과 함께 가정방문 가던 길에 지인의 사망 소식을 듣고 가정방문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이틀이 지난 월요일 수업이 끝나고 그 학생의 집을 다시 찾아 나서게 되었다. 학생과 함께 엉덩방아를 찧어 가며 덜컹거리는 시골 버스에서 내려 두 시간 남짓 비탈진 산길을 올랐다. 그러고 보니 듬성듬성 대여섯 채의 작은 마을이 나타났다. 양철 갓을 씌운 싸릿대로 만든 사립문을 열고 들어서자 구멍이 숭숭 뚫린 초가 마루에 오후 햇살이 가득하였다.
나이 지긋한 어머니는 텃밭에서 일하다 말고 막내아들의 담임을 보자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학부모의 속사정을 한참 지나서야 알 수 있었다. 토요일 교사의 가정방문 이야기는 들었으나 설마 했었다고 한다. 중·고 교사가 방문한 적이 한 번도 없는 오지마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선생님은 남다르다는 막내의 성화에 못 이겨 닭 한 마리를 잡아 두었다고 한다.
토요일 오후까지도 기다리던 가정방문이 없자 그 삶은 닭을 우물 속 두레박 깊숙이 매달아 두었단다. 이는 냉장고가 귀한 시절 음식이 상하지 않게 하는 보관 방법 중 하나였다. 일요일이 지나고 월요일 한낮이 되자 닭이 상할까 걱정이 되어 이웃과 함께 꺼내 먹었단다. 그러고 난 후 오후 늦게 담임이 나타난 것이다. 안절부절못하는 어머니의 자식 사랑이 깊은 감동으로 밀려왔다. 자식을 위해 겸연쩍어 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말문이 막혔다. 그저 학생 손을 꼭 잡아줄 뿐이었다.
자신은 굶어도 자식을 위해 등이 굽도록 헌신하다가 일생을 마치는 우리의 부모님들이다. 춥고 배고픈 시절에도 자식 교육에 열과 성을 다하였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가능한 것이리라. 해방과 6·25의 격변기에도 허리끈을 졸라매면서 자식 교육열만큼은 세계 1위를 차지하는 희생적인 우리 부모들이 아닌가.
그날 오후 늦게 오지마을 가정방문을 마치고 굽이굽이 산등성을 돌아 면 소재지에 도착해 보니 읍내로 나가는 마지막 버스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택시를 타고 밤늦게 광주 집에 도착했었다. 그러나 담임으로서 할 일을 다 했다는 자부심과 뿌듯함으로 가슴 벅찬 하루였다.
통닭 열 마리를 대접받은 것보다 더 고운 마음씨를 가진 어머니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내 생애 큰 보람이었다.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는 아름다움으로 간직하고 싶다. 알량한 상품권을 넣어주고 교사의 동정이나 살피는 도회지의 얄팍한 학부모들에 비해 얼마나 순수하고 소박했던가. 갈수록 인정이 메말라가는 세태에서도 초임 교사 시절 그날의 가정방문을 생각하면 지금도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나이 지긋한 어머니는 텃밭에서 일하다 말고 막내아들의 담임을 보자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학부모의 속사정을 한참 지나서야 알 수 있었다. 토요일 교사의 가정방문 이야기는 들었으나 설마 했었다고 한다. 중·고 교사가 방문한 적이 한 번도 없는 오지마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선생님은 남다르다는 막내의 성화에 못 이겨 닭 한 마리를 잡아 두었다고 한다.
토요일 오후까지도 기다리던 가정방문이 없자 그 삶은 닭을 우물 속 두레박 깊숙이 매달아 두었단다. 이는 냉장고가 귀한 시절 음식이 상하지 않게 하는 보관 방법 중 하나였다. 일요일이 지나고 월요일 한낮이 되자 닭이 상할까 걱정이 되어 이웃과 함께 꺼내 먹었단다. 그러고 난 후 오후 늦게 담임이 나타난 것이다. 안절부절못하는 어머니의 자식 사랑이 깊은 감동으로 밀려왔다. 자식을 위해 겸연쩍어 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말문이 막혔다. 그저 학생 손을 꼭 잡아줄 뿐이었다.
자신은 굶어도 자식을 위해 등이 굽도록 헌신하다가 일생을 마치는 우리의 부모님들이다. 춥고 배고픈 시절에도 자식 교육에 열과 성을 다하였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가능한 것이리라. 해방과 6·25의 격변기에도 허리끈을 졸라매면서 자식 교육열만큼은 세계 1위를 차지하는 희생적인 우리 부모들이 아닌가.
그날 오후 늦게 오지마을 가정방문을 마치고 굽이굽이 산등성을 돌아 면 소재지에 도착해 보니 읍내로 나가는 마지막 버스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택시를 타고 밤늦게 광주 집에 도착했었다. 그러나 담임으로서 할 일을 다 했다는 자부심과 뿌듯함으로 가슴 벅찬 하루였다.
통닭 열 마리를 대접받은 것보다 더 고운 마음씨를 가진 어머니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내 생애 큰 보람이었다.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는 아름다움으로 간직하고 싶다. 알량한 상품권을 넣어주고 교사의 동정이나 살피는 도회지의 얄팍한 학부모들에 비해 얼마나 순수하고 소박했던가. 갈수록 인정이 메말라가는 세태에서도 초임 교사 시절 그날의 가정방문을 생각하면 지금도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