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균- 광주예술고 교감] ‘내후년’을 트집하다 보니
2021년 05월 26일(수) 05:20
며칠 전 신문에서 ‘환경부, 내후년부터 고흡수성수지 아이스팩에 폐기물 부담금 부과’라는 표제(表題)가 눈에 들어왔다. ‘내후년’은 과연 언제일까? 다가오는 연도는 ‘금년(올해)-내년-후년-내후년’ 순으로 헤아리기에 2024년을 염두에 뒀는데, 기사 본문에는 “이번 법률 개정 시행령은 내년 출고·수입분부터 적용돼 실제 부담금 부과는 2023년 4월에 이뤄진다”라고 설명되어 있었다.

고흡수성수지는 자기 체적 50~100배의 물을 흡수하는 플라스틱으로 수분이 많아 소각이 어렵고, 매립 시 자연 분해에 500년 이상 걸린다. 그래서 폐기물 부담금을 통해 단가를 올려, 상대적으로 저렴해진 친환경 아이스팩 생산과 소비를 활성화하려는 정부의 노력을 알리는 게 보도에 함축된 목적일 것이다. 그런데 내후년의 뜻도 모르고 기사를 썼다고 비난하면 될까. 이마저도 어설픈 지식의 잣대로 괜한 트집 잡는 억지 춘향 아닐까.

기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은 ‘내후년’을 ‘후년의 바로 다음 해’로 풀이하고 있다. 그런데 언중(言衆)이 ‘내년의 다음 해’ 즉, ‘후년’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는 사례가 빈번하다 보니, 올해 4월 12일자로 ‘올해의 다음다음 해’로도 사용된다고 뜻을 추가하였다. ‘낼모레(내일모레)’가 ‘모레’와 동의어이듯이 ‘내후년’도 ‘후년’과 같아야 한다는 일각의 주장도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한데 사전적 정의를 추가한 까닭은 무엇일까. 언어는 개념을 담는 그릇이고, 언어생활은 우리의 사고방식을 구체적으로 규정한다. 따라서 언어라는 도구가 잘못되면 개개인의 삶과 사회에 문제점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러니 올바른 언어를 이해하고 선택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 규범을 제시하는 것이 표준국어대사전의 역할일 텐 데, 2년 뒤도 내후년이고 3년 뒤도 내후년이라 하면 오히려 혼란을 자초하는 일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렇지만 단어의 뜻이 다양하게 분화되는 것은 언어의 자연스러운 특성이며, 표면적인 의미만으로 단순하게 사용되지는 않는다. 고흡수성수지의 ‘수지’(樹脂)는 원래 소나무 따위의 나무에서 분비하는 점도가 높은 액체인 나뭇진을 의미하는 단어였다.

“전쟁은 지옥이다(War is Hell)”는 표현도 좋은 예가 된다. 이 말에서 전쟁의 참혹함과 평화의 중요성을 떠올리는 것은 인지상정일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은 미국 남북전쟁 당시 북군의 윌리엄 셔먼(William T. Sherman) 장군이 “전쟁을 통해 남군이 지옥을 맛보게 하겠다”며 남군의 도발에 대한 응징의 의미로 처음 사용했다고 한다. 이렇듯 상황과 맥락 속에서의 다양한 해석 가능성 또한 언어의 특징이기에, 이를 외면하면 다양한 억측을 낳을 수 있다.

문해력(文解力, literacy)은 글자를 읽거나 듣는 능력이 아니라 문장을 맥락 속에서 실제로 이해하는 능력이다. 세종대왕 덕분에 문맹률은 1% 이하인 우리나라지만 문해력은 OECD 국가 중 최하위이거나 최소 중간 이하라는 게 중론이다.

이런 일화가 있다. 고등학교 사회 수업 시간에 교사가 영화 ‘기생충’을 소개하며 “이 영화의 구성 초기에 가제는 데칼코마니였대요. 가제가 뭐야, 아는 사람?”하고 물으니, “랍스터요”라고 한 학생이 대답하였다. 얼마 전 방영된 EBS ‘당신의 문해력’이라는 프로그램의 한 장면이다. ‘ㅔ’와 ‘ㅐ’를 혼동해서 ‘가재=랍스터’를 연상할 수는 있겠지만, 대화 맥락에서는 가재가 등장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러니 영화를 통해 기득권, 위화감 등의 용어와 함께 사회 불평등 현상에 접근하려던 교사의 당혹스러움은 익히 상상이 된다.

우리 주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담화의 맥락을 읽지 못하고 어휘나 상황 하나에 집착해 비판하고, 나아가 진영 논리로 비화되는 사례를 자주 발견한다. 혐오스러운 허언(虛言)으로 구독자 수를 늘리려는 매체를 보면, 낮은 문해력을 역이용하는가 싶기도 하다. 문해력은 지식의 정도보다 가치관과 태도의 영향이 크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사회적 불합리에 대한 문제 제기는 당연하겠지만 보고 싶은 것만 보는 태도나 혐오를 극복해야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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