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진 상지대 명예교수] 일화(逸話)로 보는 다산(茶山)의 다른 얼굴
2021년 05월 25일(화) 07:00 가가
오늘은 다산의 기재(奇才)를 알려 주는 야담이나 일화로 그의 다른 얼굴을 소개하려고 한다. 다산의 천재성은 여러 야담·일화에 숨어 문자로 혹은 구전(口傳)으로 이어져 왔다. 특히 ‘문자 놀이’는 그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일화에 속한다.
전통 시대 독서인들이 서당에서 글 읽다가 흔히 벌이는 ‘글자 놀이’는 경전(經典)의 글귀를 따와 글자를 맞추는 것이 일반적이다. 예를 들면, 상대가 설사(說辭)하면 바로 물똥(勿動)으로 응대하는 것 등이 그렇다. 사실 설사는 ‘말을 잘한다’, 물동은 ‘흔들리지 않는다’는 논어(論語)의 글귀인데, 본 의미는 버리고 소리만을 따온 것이다. 이는 조선 사대부 문화의 한 양태이다.
이와 달리 다산의 글자 놀이는 매우 폭넓고 다양하다. 그의 민첩한 글귀 응대 현장을 보자. 15세로 장가갈 때의 일화이다. 처 종형인 홍인호(洪仁浩)가 ‘사촌매부(四寸妹夫) 삼척동자(三尺童子)’라고 놀리자, 다산은 ‘중후장손(重厚長孫) 경박소년(輕薄少年)’이라고 바로 맞받아 상대의 기를 단번에 꺾어 놓은 것이 대표적인 예다. 세상에 널리 알려진 다산과 정조의 글자 놀이도 한번 보자. 상대가 글자를 던질 때 바로 대답하지 못하면 지는 게임인데, 즉석에서 발음이 같은 단어를 대는 문답이다.
정조가 먼저 ‘말니(말의 이빨) 마치(馬齒) 하나 둘 일이(이리, 一二)’ 하니 다산은 ‘닭의 깃이 계우(鷄羽) 열다섯 이오(二五)’라고 답한다. ‘일이’와 한자 ‘일이’(一二)의 발음이 같고 ‘이오’와 한자 ‘이오’(二五)의 발음이 같은 것을 이용한 것이다. 이어 정조가 ‘보리 뿌리 맥근 맥근(麥根)’이라 하니 다산은 ‘오동 열매 동실 동실(桐實)’이라 받아친다. 다시 정조가 ‘아침 까치 조작 조작(朝鵲)’ 하니 다산은 ‘낮 송아지 오독 오독(牛犢)’이라고 화답한다.
홑 글자로 겨루는 내기도 있었다. 다산과 정조가 겨룬 홑 글자 게임은 같은 글자 세 개가 모여 이루어진 한자를 서로 번갈아 가며 대는 놀이였다. 즉 한 사람이 “계집 ‘여’(女)가 셋 모이면 간사할 ‘간’(姦)” 하면 상대방이 “입 ‘구’(口)가 셋 모이면 뭇 ‘품’(品)” 하는 식이다. 계속해서 맑을 ‘정’(晶), 나무 빽빽이 들어설 ‘삼’(森), 돌 쌓일 ‘뢰’(磊) 등의 글자가 이어진다.
그러다가 다산이 “전하께서 한 글자만은 신(臣)에게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하니 정조가 “모든 자전(字典)에 있는 글자를 죄다 외웠는데, 한 글자는 모를 거라니 무슨 말이냐?”라고 묻는다. 다산이 “그러셔도 이 글자만은 모르실 겁니다” 한 뒤 서로 적은 글자를 펴 보는데, 그때서야 정조가 ‘일’(一)이 셋 모인 ‘삼’(三)자를 놓친 걸 알고, 군신이 서로 한바탕 크게 웃었다고 한다. 두터운 믿음과 서로를 품어 주는 모습이 아름답다. 문자 그대로 임금과 신하가 서로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이 즉, 군신지기(君臣知己)의 실감 나는 장면이다.
다산이 유배에서 벗어날 때도 감춰진 일화가 있다. 순조 18년(1818) 첫 가을에 당시 세도가였던 김조순(金祖淳)의 집안 인물인 김이교(金履喬)가 강진 귀양지에서 풀려 귀경길에 오르면서 다산초당에 들렀다. 당색은 다르지만 같은 나이인 데다, 한림(翰林) 동료로 사귐이 남달랐는데, 세월이 흘러 두 사람은 어느덧 백발노인으로 만나게 된 것이다.
서로의 손을 부여잡고 한바탕 눈물을 쏟은 뒤 못다 한 이야기로 밤을 지새웠다. 김이교는 내심 다산이 어떤 부탁을 하리라 여겼는데 다산은 내내 정담만 꺼낼 뿐이었다. 마침내 십 리 밖까지 전송 나온 다산에게, “여보 영감, 내게 할 말 없소?” 물으니, 다산은 “없소이다”라고 짧게 말한 뒤 쥘부채(摺扇)에 아래의 작별시를 써 주는 것이었다.
“가을비 내리는 역사(驛舍), 이별이 더디구나(驛亭秋雨送人遲)/ 만 리 밖 외딴 이곳 누가 다시 찾아오리(絶域相尋更有誰)/ 반자의 신선이야 어찌 바랄 수 있을까만(班子登仙那可望)/ 이릉의 귀향도 마침내 기약하기 어려워졌구려(李陵歸漢竟無期)/ 대유사(大酉舍)에서 글 짓던 일 눈앞에 삼삼한데(尙思酉舍揮毫日)/ 경신년(1800) 임금님 별세, 그 아픔 차마 입에 담을까(忍說庚年墜일時)/ 빼마른 대나무 그루터기에 새벽 달빛 비추면(苦竹數叢殘月曉)/ 고향으로 고개 돌려 주룩주룩 눈물만 흘리리.(故園回首淚垂垂)”
이교가 그 부채를 들고 서울에 돌아와 재상인 김조순의 사랑에 들렀다. 조순은 이 시(詩)를 금세 알아보고 슬픔이 가득한 얼굴로, “이건 미용(美鏞: 다산의 자)의 시가 아닌가?” 했다. 그리고 바로 국왕에게 아뢰어 다산이 해배(解配)되었다고 전해진다. 위에서 소개한 일화들은 다산의 천재적 재능과 정조와의 자별한 교분, 그리고 학문과 의리를 지키려는 그의 견고한 마음을 세상 그 어떤 것도 흔들지 못했음을 보여 준다.
이와 달리 다산의 글자 놀이는 매우 폭넓고 다양하다. 그의 민첩한 글귀 응대 현장을 보자. 15세로 장가갈 때의 일화이다. 처 종형인 홍인호(洪仁浩)가 ‘사촌매부(四寸妹夫) 삼척동자(三尺童子)’라고 놀리자, 다산은 ‘중후장손(重厚長孫) 경박소년(輕薄少年)’이라고 바로 맞받아 상대의 기를 단번에 꺾어 놓은 것이 대표적인 예다. 세상에 널리 알려진 다산과 정조의 글자 놀이도 한번 보자. 상대가 글자를 던질 때 바로 대답하지 못하면 지는 게임인데, 즉석에서 발음이 같은 단어를 대는 문답이다.
그러다가 다산이 “전하께서 한 글자만은 신(臣)에게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하니 정조가 “모든 자전(字典)에 있는 글자를 죄다 외웠는데, 한 글자는 모를 거라니 무슨 말이냐?”라고 묻는다. 다산이 “그러셔도 이 글자만은 모르실 겁니다” 한 뒤 서로 적은 글자를 펴 보는데, 그때서야 정조가 ‘일’(一)이 셋 모인 ‘삼’(三)자를 놓친 걸 알고, 군신이 서로 한바탕 크게 웃었다고 한다. 두터운 믿음과 서로를 품어 주는 모습이 아름답다. 문자 그대로 임금과 신하가 서로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이 즉, 군신지기(君臣知己)의 실감 나는 장면이다.
다산이 유배에서 벗어날 때도 감춰진 일화가 있다. 순조 18년(1818) 첫 가을에 당시 세도가였던 김조순(金祖淳)의 집안 인물인 김이교(金履喬)가 강진 귀양지에서 풀려 귀경길에 오르면서 다산초당에 들렀다. 당색은 다르지만 같은 나이인 데다, 한림(翰林) 동료로 사귐이 남달랐는데, 세월이 흘러 두 사람은 어느덧 백발노인으로 만나게 된 것이다.
서로의 손을 부여잡고 한바탕 눈물을 쏟은 뒤 못다 한 이야기로 밤을 지새웠다. 김이교는 내심 다산이 어떤 부탁을 하리라 여겼는데 다산은 내내 정담만 꺼낼 뿐이었다. 마침내 십 리 밖까지 전송 나온 다산에게, “여보 영감, 내게 할 말 없소?” 물으니, 다산은 “없소이다”라고 짧게 말한 뒤 쥘부채(摺扇)에 아래의 작별시를 써 주는 것이었다.
“가을비 내리는 역사(驛舍), 이별이 더디구나(驛亭秋雨送人遲)/ 만 리 밖 외딴 이곳 누가 다시 찾아오리(絶域相尋更有誰)/ 반자의 신선이야 어찌 바랄 수 있을까만(班子登仙那可望)/ 이릉의 귀향도 마침내 기약하기 어려워졌구려(李陵歸漢竟無期)/ 대유사(大酉舍)에서 글 짓던 일 눈앞에 삼삼한데(尙思酉舍揮毫日)/ 경신년(1800) 임금님 별세, 그 아픔 차마 입에 담을까(忍說庚年墜일時)/ 빼마른 대나무 그루터기에 새벽 달빛 비추면(苦竹數叢殘月曉)/ 고향으로 고개 돌려 주룩주룩 눈물만 흘리리.(故園回首淚垂垂)”
이교가 그 부채를 들고 서울에 돌아와 재상인 김조순의 사랑에 들렀다. 조순은 이 시(詩)를 금세 알아보고 슬픔이 가득한 얼굴로, “이건 미용(美鏞: 다산의 자)의 시가 아닌가?” 했다. 그리고 바로 국왕에게 아뢰어 다산이 해배(解配)되었다고 전해진다. 위에서 소개한 일화들은 다산의 천재적 재능과 정조와의 자별한 교분, 그리고 학문과 의리를 지키려는 그의 견고한 마음을 세상 그 어떤 것도 흔들지 못했음을 보여 준다.